"악인은 없다, 피해자뿐"…美 '적색 사냥' 다룬 '아메리칸 드림'

최용대 발행인/ 주필 기자

등록 2026-10-31 18:01

일본 희극 거장 미타니 고키 신작…억압에 맞서는 영화인들 그려


곳곳에 숨긴 유머로 부조리 풍자…내달 1일까지 서울 코엑스아티움


연극 '아메리칸 드림' 한국 공연연극 '아메리칸 드림' 한국 공연 [파르코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권지현 기자 = "영화를 만드는 건 내 의무야. 난 동료를 배신하더라도 영화를 계속할 거야." ('감독' 역 아사노 가즈유키)


"약자를 팔고 어떻게 약자를 위한 작품을 쓸 수 있겠어요"('각본가' 역 고히나타 후미요)


냉전 시대 미국, 국가로부터 동료 중 공산주의자의 이름을 대라는 위협을 받는 영화인들. 이름을 대지 않으면 일을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수감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이들은 각자 다른 선택을 한다. 누군가는 적극적으로 배신자가 되는 쪽을, 누군가는 억압에 맞서는 쪽을 택한다.


30일 서울 코엑스아티움에서 개막해 다음 달 1일까지 이어지는 연극 '아메리칸 드림'은 권력의 억압과 선택의 기로 속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예술을 이어가는 영화인들의 모습을 그렸다.


작품은 일본 극작가 겸 연출가 미타니 고키의 신작으로 국내에서는 처음 공연됐다. 냉전이 한창이던 1940년대 후반 미국 할리우드를 배경으로 공산주의자를 광적으로 색출하는 이른바 '적색 사냥'을 다뤘다. 사상 검증과 동료 밀고 요구를 받는 영화인들은 자신의 신념을 지킬 것인지, 살아남기 위해 동료들을 배신할 것인지 선택의 갈림길에 선다.


작품에는 실존 할리우드 영화인인 돌턴 트럼보, 엘리아 카잔, 베르톨트 브레히트, 킴 헌터를 모델로 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들을 취조하는 '위원' 두 명을 등장시켜 밀실 속에서 진행되는 조사 과정을 그린다.


연극 '아메리칸 드림' 한국 공연연극 '아메리칸 드림' 한국 공연 [파르코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미타니는 공연 전 취재진과 만난 자리에서 등장인물에 대해 "악인은 없다. 있는 것은 피해자뿐"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그의 말대로 작품은 동료를 밀고하는 캐릭터조차 마냥 비난하는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아사노 가즈유키가 연기한 '감독'은 조사위원들과 적극적으로 내통하고 동료를 팔아넘기는 인물이지만, 이는 장인 정신을 가진 인물이 영화를 만드는 사명을 최우선으로 여긴 결과였다. 그는 함께 조사받은 무명의 여배우에게 일할 기회를 주기도 한다.


심지어 취조하는 위원들조차 악인이 아니다. 영화인을 꿈꿨던 '위원 2'는 조사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며 공산주의자 명단을 밝혀내려 애쓰지만, 동시에 조사받는 영화인들이 계속해서 작품 활동을 이어가기를 누구보다 진심으로 바라는 인물이기도 하다. 영화를 경멸하는 또 다른 위원조차 "이런 시대가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그때까지만 할 일을 하는 것뿐"이라고 말한다.


권력과 맞서는 예술가의 태도에 대해 정답을 두지 않은 채, 작품은 다만 이러한 억압이 얼마나 잔혹하며 예술가들의 생존과 존엄성이 얼마나 위협을 받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러한 주제 의식은 극작가 브레히트를 모델로 한 '망명 작가'가 "자유를 찾아 미국으로 왔지만 '아메리칸 드림'은 허상이었다"는 취지로 한탄하고 "공산주의자를 색출하는 이런 방식이야말로 공산주의적 방식"이라고 일갈하는 데서 잘 드러난다.


연극 '아메리칸 드림' 한국 공연연극 '아메리칸 드림' 한국 공연 [파르코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웃음의 대학' 등 코미디 거장으로 잘 알려진 미타니 고키는 '아메리칸 드림'에 대해 "코미디 장르가 아니다. 웃음기 없이 진지하게 다가가고자 했다"고 말했지만, 이번 작품에도 곳곳에 긴장을 푸는 희극적 요소가 슬쩍 엿보였다.


조사 도중 영화 이야기를 하며 갑자기 조사위원이 연기 테스트를 받거나, 긴장된 분위기에서 독일식 소시지에 집착하는 망명 작가의 능청스러운 연기에 객석에서는 자주 웃음이 터졌다.


엉뚱한 대사와 웃음 코드는 관객을 즐겁게 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적색 사냥의 광풍을 우스꽝스럽게 묘사해 풍자하는 역할도 한다.


예컨대 "당신은 코뮤니스트(공산주의자)인가요?"라는 질문에 채식주의자를 판별하는 기준에 대한 긴 설명을 늘어놓고 "나는 채식주의자가 아니다"라고 답하는 망명 작가의 답은 일견 뜬금없는 답변으로 보이지만 그만큼 상황의 부조리함을 강조하는 장치다.


밀실 속 치열한 심리 싸움과 설전, 그 속에서 군데군데 터지는 웃음과 휴머니즘적 코드를 살릴 수 있었던 것은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 덕이다.


이번 한국 공연에는 '아메리칸 드림'의 일본 초연 무대에 올랐던 고히나타 후미요, 아사노 가즈유키, 야마자키 하지메, 아사노 마사히로, 세키야 하루코, 나카가와 다이시가 출연했다.


50년의 연기 경력을 자랑하는 고히나타의 카리스마 넘치면서도 능글맞은 연기를 필두로 출연진 여섯 명 모두가 존재감 있는 연기력을 자랑한다. 공산주의자를 색출하는 무거운 장면을 순식간에 유머러스한 장면으로 전환하고, 다시 진지한 분위기로 돌아와 통찰이 담긴 메시지를 던지는 능숙한 연기가 감탄을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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