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연재/ 인문철학》 이고득락(離苦得樂)을 학습하다 ① _최용대

이원희 보도본부/ 편집국장 기자

등록 2026-03-02 21:33

한국매일뉴스 최용대 발행인



이고득락(離苦得樂)을 학습하다

1. 고(苦)의 두 얼굴 — 외부와 내면


늙기 시작하는 나이에 3,000년 전의 인도인을 만났다. 그 사람은 이고득락(離苦得樂)을 추구하다 깨달음을 얻어 각자(覺者)가 되었다 한다. 어디 그 사람만 고(苦)를 싫어하고 낙(樂)을 좋아하겠는가. 나도 똑같이 그렇다. 어쨌거나 육십갑자를 한 바퀴 도는 동안 제 딴에는 이 궁리 저 궁리 하며 살아온 것도 다 그것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나는 여전히 풍진 세상을 살면서 무언지 모를 불만족 내지 불안증으로 항상 꽁무니가 뒤숭숭한데, 그분은 깨달은 사람이 된 것이다.


그 차이를 만들어낸 첫 출발은 아마도 고(苦)의 깊이였을 것이고, 두 번째는 이고(離苦)의 치열함이었을 것이다. 나의 고(苦)는 내 뜻과 거슬려 있는 외부의 상황이었다. 그래서 고(苦)에 대한 대처란 그것과 싸우거나 저항하거나, 아니면 그것들에 오염되지 않으려고 몸을 움츠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저항도 철저하지 못해서 상황에 대한 투덜거림에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그분은 고(苦)의 뿌리를 자기 속에서 보았고,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더 이상 갈 곳 없는 곳까지 달려 나갔다. 나는 개미굴을 파다 그만둔 정도였다면, 그분은 자기 속에서 시작하여 우주의 중심까지 파 내려간 것이었다.


무엇이 고(苦)인가.


나는 세상의 구구절절한 사연 속에서 부지기수의 고(苦)와 부딪쳤다. 그런데 한 가지에 대해서는 감히 고(苦)라는 생각을 가질 수 없었다. 그것은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이었다. 그것에 대해선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분은 그 마지막 한 가지를 파고들어 더없는 낙(樂)에 도달하였다는 것이다.


천재는 그것을 예리하게 느끼지만, 보통 사람들은 희로애락에 정신이 팔려 미처 알아채지 못한다. 그래도 우리의 무의식은 그것을 느끼고 있기에 둔한 우리들도 무엇 때문인지 모르면서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모양이었다. 나는 깨달은 인도인을 만난 뒤에야 비로소 내 무의식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자기 존재에 대한 불안이었다.


자신이 무한 우주 속을 떠도는 티끌 같다는 느낌. 그것이 떠도는 시간이라야 우주의 찰나이겠으나, 티끌 자신에게는 불안으로 오그라들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자기 존재의 밑바닥이 물거품만큼이나 허약하다는 사실을 뻔히 보고 있는 다음에야 그 무엇을 도모할 수 있겠는가. 사람이란 제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보증을 얻기 전에는 어떠한 부귀영화에도 편안해지지 못하는 족속이다.


나도 인도의 그분처럼 그렇게 고귀한 열망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사람을 사랑한다. 고(苦)를 느낄 줄 알고, 그 고(苦)를 떠나 청정해지고 싶어 하는 열망을 품은 영적인 존재인 사람을 사랑한다.



해탈 — 개체의 포기, 그리고 그 이후
인식의 전환으로서의 깨달음


"깨달음이란 인식의 전환이다." 스승을 처음 만났을 때 들은 그 말은 나를 놀라게 했다. 나는 깨달음을 구름 위에 두둥실 떠 있는 어떤 거룩하고 고귀한 상태로만 여기고 있었다. 제작 비결이 끊어져 더욱더 신비하고 아름다우며, 너무 고귀해 도저히 우리네 밥그릇이 될 수 없는, 박물관 진열장 속에 고고히 전시되어 있는 고려청자 같은 깨달음 말이다. 그런데 깨달음이 인식의 전환이란다. 잘못된 관점을 가지면 우리는 스스로를 번뇌에 빠뜨리고, 바른 관점을 가지면 스스로를 해탈케 한다는 말씀이다.

'나 있음'이라는 관점에 매달려 죽음이라는 번뇌에 시달리다가, 우주의 존재 법칙을 발견하고 '나 없음'의 관점으로 전환하여 즉시 고통을 떠나보내고 본래 청정, 본래 행복을 얻은 것, 그것이 부처님의 깨달음이란다.


달리는 버스 속. '나'라는 개념 조각을 치워버리고 그냥 있는다. 텅 빈 채로 그냥 있는다. 버스가 달리면 달릴수록 시간은 귓전을 휘파람처럼 지나간다. 삼라만상이 찰나에 변해간다. '나'라는 이것도 무상(無常)하여 그냥... 비어... 있다. '나'라는 바늘구멍을 치워버리니 무한으로... 그냥 비었다. '나'라는 개체는 죽어서 의자 등받이에 간신히 걸쳐져 있는데, 죽은 시체는 기체 같은 편안함을 호흡한다. 텅 빔의 창의성으로 넘실대는 이 충만함, 더없는 이 만족스러움, 지극한 이 평화로움...


개체를 포기한다는 것


개체를 포기했을 때, 개체를 벗어났을 때, 개체가 죽었을 때, 어째서 이리도 편안한 걸까. '나'라는 개체는 무한 우주의 암흑천지 속에서 목숨을 지켜보려고 죽을힘을 다하는 하루살이 같은 것. 그러한 개체임을 벗어난다는 것은 개체로 살아내기 위해 치러야 하는 경계심, 두려움, 혼란, 사나움, 공격성, 저항심, 까칠함, 허덕임, 서늘함, 날카로움, 단절감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간의 골수에 박힌 이기심 등등, 개체를 피폐하게 하는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다. 


무한 우주와 대항하느라 온몸에 독 오른 털을 곤두세우던 쐐기벌레 한 마리가 공(空)의 바다에서 그냥 스스로를 놓아버렸을 때의 편안함. 그것은 45억 년 동안의 무장이 해제되면서 45억 년 동안 쌓였던 만성피로증후군에서 해방되어 그대로 본래 평화, 본래 만족, 본래 해탈로 돌아가는 것. 그렇게 개체를 버리면 곧장 무(無)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전체가 되는 것이니 — 존재는 본디부터 뿔뿔이 흩어진 티끌이 아니라 모두가 한 덩어리, 한 유기체이기 때문이니 싯다르타의 진정 위대한 포기는 부귀영화의 포기가 아니라 '개체의 포기'였다. 


아름다운 신체와 수승한 지적 능력을 지니고 태어나 그 출중함을 영원히 누리지 못하고 벌레와 매한가지로 어느 날 먼지로 화해간다는 것을 결단코 수긍할 수 없었던 한 사람의 인간. 그는 그러한 개체의 영원한 보전을 구하려 부모를 버리고, 처자를 버리고, 왕위를 버렸다. 그리곤 6년에 걸친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보리수 아래에서 연기법이라는 존재의 법칙을 발견하고 그 법칙을 철저히 간파하였다. 모든 것이 모든 것의 존재 근거가 되는 연기의 세계에선 도무지 '나'라고 할 수 있는 개체가 있을 수 없으며 모두가 한 몸임을 사무치게 보신 그분은 개체의 관점을 버리고 드디어 개체의 온갖 고통에서 해탈한 '행복한 사람'이 되신 것이다.


나는 개체가 아니었다. 먼지 조각이 아니었다. 무한 우주가 동원되어 비로소 존재하는 이것을 어찌 비루한 쪼가리라 할 수 있는가. 이 존재는 시(是)와 비(非)를 넘어서 있는 절대 긍정의 존재, 어떤 개념보다 우선해 있고 어떤 이름으로도 한정될 수 없는 존재였다! 이쪽을 시(是) 하면 저쪽이 비(非)로 아우성이고, 저쪽을 시(은) 하면 이쪽이 비(非)로 시끄러운, 그래서 영원히 통일점에 도달하지 못하고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는, 피곤에 지친 존재. 그런 가엾은 파편이 아니라 그냥 전부로 우뚝한 존재. 결코 폐쇄되거나 멈추지 않는, 우주의 무한 가능성으로 가득한, 무한으로 열린 존재. 아, 이것이었던가. 본디 이것이었던가. 본디 이것이었는데 시시껄렁한 개념 조각들에 둘러싸여 그것들이 저마다 찢고 까부르는 소리에 신경쇠약을 앓으며 살았구나! 이것이 이해되자 모든 문제는 이상 끝이었다. 즉탈(卽脫)이었다.



즉탈(卽脫)의 기쁨


자신을 유한한 개체로 여기는 유위(有爲)의 관점에서 무한한 전체로 여기는 무위(無爲)의 관점으로 전환하면 즉시 문제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우주의 모든 것에 신뢰감이 생겼다. 옳고 그름에 매달려 있던 시절, 늘 자신을 단속하고 외부를 경계해야 했다. 그러나 그 단속과 경계가 철저하면 할수록 시시비비가 들끓었다. 그런 와중에 나의 ‘울타리’ 바깥쪽에서 떠들어대는 자들에 대한 시선이 싸늘해지고 어떤 우월감마저 들었다. 그러나 자기 밑뿌리의 절대 긍정성을 이해하자 스스로를 단속하느라 자신에게 선포했던 계엄령이 저절로 풀려 나갔다.


“아니야, 그건 아니야. 틀렸어. 비슷해 보이지만 그건 가짜야, 틀렸어.”

고통에 저항하고 세상의 즐거움을 경계하며 끝날 길 없이 그렇게 중얼거려야 했던 비상사태가 사라졌다. 또한 계엄령에도 불구하고 뒤숭숭함의 꼬리에 은밀하게 붙어 있던 어떤 탐닉의 에너지도 사라졌다. 빠져나갈 길이 보이지 않는 쳇바퀴 놀이를 하면서 때때로 그냥 무엇엔가 코를 박고 없어지고 싶게 하던 그런 에너지, 상해 가는 과일의 향기에 끌려가 버리고 싶던 그 충동적 에너지가 꼬리를 감추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세상의 즐거움에 대한 경계심이 풀려 나갔다.


세상의 즐거움, 보통 행복이라고 불리는 그것을 나는 늘 미심쩍어했다. 부박한 세상에 경박한 자들이 쫓아다니는 것, 표피적이고 이기적이고 장사꾼들의 사탕발림 같은 것. 물론 고(苦)를 싫어하고 낙(樂)을 좋아하니 나라고 해서 좋아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었다. 내가 ‘세상의 행복’에 대해 코웃음 치며 그 대신 떠받들고 있던 것은 어떤 의미 혹은 감동이었는데, 그것이 정확하게 무엇을 말하는지는 애매하였다. 그런 나침반을 옆구리에 차고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살아오면서 세상의 즐거움에 삼켜지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스스로에 대한 신뢰감으로 발밑이 탄탄해지자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해서 너그럽고 여유로워졌다. 세상의 행복거리에 매몰되지 않는다는 것은 꼬장꼬장하거나 냉소적이 된다는 뜻이 아니었다. 

행복해지고 싶어 하는 모든 산 것들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고, 살아 있음이 제공하는 행복거리를 충분히 누릴 수 있는 능력은 풍부한 포용력을 지닌 진정으로 대자대비한 존재가 되기 위한 중대한 능력이었다.  

                                                                                                     


                                                                                                              _최용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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