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연재/ 인문철학》 이고득락(離苦得樂)을 학습하다 ② _최용대

이원희 보도본부/ 편집국장 기자

등록 2026-03-02 21:49

낙수(樂受) 위에 사수(捨受)를 하라.

낙수 없는 사수는 우울증을 부른다.

카리스마의 기초는 행복이다.



한국매일뉴스 최용대 발행인 



행복 누리기를 학습하라



“사랑해, 진돌이. 사랑해, 진순이.”

우리 집 개 두 마리를 쓰다듬으며 이렇게 ‘사랑’을 고백한다. 그러면 그놈들도 꼬리를 찰랑대고 혀로 내 코를 핥으며 철철철 행복에 넘친다. 개의 행복에 사람의 가슴은 더 따스해진다. 그런데 이게 무슨 것일까. 어째서 사람에게는 그냥 “사랑해.” 하지 않으면서 개에게는 이 따위 바보 같은 수작을 하고, 그 바보 같은 수작에 이어 더 바보같이 행복해할까. 그리고 도대체 이 행복감은 무엇인가.

개와 사람 사이의 허공 속에서 생겨나 눈에 보이지도 않으면서 이렇게 산 것들의 가슴으로 번져 오는 이 느낌은 무엇이란 말인가. 사람과는 그다지 나누지 못하는 이런 정서. 이것은 어떤 기대도 없이 그냥 그 존재 자체를 온전히 수용하기에 생겨나는 기쁨이라는 것에 눈을 뜬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사랑 속에는 기대가 없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떻게 개에게 그러하듯 자식이나 아내에게 아무런 기대를 품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 정말 그렇다면 그것은 오히려 자식과 아내에 대한 부당한 대우로 여겨졌다.
한데 그 기대란 것은 제 욕심을 아름답게 부르는 말이었다. 아무런 욕심도, 요구도 없이 이 지구 위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함께 숨 쉬고 있다는 그 사실만으로 그냥 고마워하면 가장 순수하게 기뻐진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해 준 이들은 우리 집의 진돌이와 진순이였다.

“좋은 하루 되시길 빌어요.” 전철 앞자리에 앉은 사람에게 마음속으로 그렇게 전해 본다. 옥수수를 팔고 있는 아줌마에게 “많이 파세요.” 그런 인사를 한다. 세상을 향해서 긍정의 에너지를 보내 본다. 책상 위의 물건들에게, 슈퍼 선반 위의 사탕 봉지에, 달리는 택시에게, CD 속의 가수에게…. 금방 가슴이 따스해 온다. 그리고 행복하다.

사랑은 왜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걸까. 우리는 오랜 세월을 ‘나’로, 개체로 살아왔다. ‘너’에 대항하며 ‘나’로 살면서도 무의식 속에서는 본디 한 몸인 상태를 끝없이 갈구한다. 그러한 이력으로 겉으론 멀쩡한 엿가락 속에 구멍이 뚫려 있듯이 자신도 모르는 구멍들을 지니고 있다. 존재의 미세한 구멍들은 늘 무언가 부족감과 불만감 그리고 불안감을 느끼게 한다. 난파가 결정되어 있는 배 위에서 속수무책으로 출렁이면서 생겨난 그 무수한 빈 곳.
사랑은 그 빈 곳을 채워 준다. 그리고 그 빈 곳이 채워질수록 사람들은 더욱 수월하게 ‘개체’를 벗어날 수 있다. 무조건 사랑하고 무조건 긍정하기. 이것은 어떤 도덕적 요구가 아니다. 이 세계의 본바탕이 본디 절대 긍정이기에 그러한 것이다.

연기(緣起)의 그물코를 이루고 있는 것들은 모두 평등하고 모두 시비(是非)를 벗어나 있다. 그물코가 사람이든, 벌레든, 꽃이든, 질병이든, 죽음이든 그것은 모두 지금 이 자리, 이 시간의 나를 이루고 있는 우주의 성분들, 우주의 선물들이다. 그 선물들을 수용하고 받아들이고 고마워하는 것, 그것이 ‘사랑’이고 그 사랑의 축복으로 우리는 행복해진다.

행복하지 않은 카리스마는 폭군이 되기 쉽다.
세상을 행복하게 하려면 우선 자신부터 행복하라.
자비 속에서 옳고 그름을 보아라.


보살이 되려면 세상이 모두 행복해지기 전에는 절대로 행복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우선 본인부터 행복해져야 한다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존재란 본디 행복하기 때문이다. 먼저 그것을 깨닫고 그것을 맛보고 그 에너지로 다른 이들도 본래의 행복으로 인도하라는 말씀이다.

최종 목표에만 집중하여 과정에서 만나는 것들을 무뚝뚝한 눈으로 바라보며 행복해지지 못한다면 우리 몸의 세포들은 잿빛으로 변하고 우리는 죽은 인생을 산다. 인생의 희로애락에 대해 아무런 반응도 없이 그저 구름 위에 깨끗하게 떠 있는 것이 깨달은 사람이라면, 그런 각자(覺者)는 유위(有爲)의 행복을 구해 애쓰는 세상인들을 싸늘한 눈초리로 바라보는 폭군이 되기 쉽다.

세상을 행복하게 하고 싶다면 먼저 자신부터 행복 민감도를 높여야 한다. 우리의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가 만나는 세상의 모든 것들에 대해 긍정의 에너지를 보내고 그것을 사랑하고 그 사랑이 주는 기쁨을 누린다. 만나는 이웃집 사람에게서, 친구의 목소리에서, 아침의 비누 냄새에서, 쥐는 숟가락에서, 의식하는 그 모든 것에서, 그리고 이러한 모든 것을 경험하게 해 주는 의식이라는 신비하고도 신비한 우주의 기운에 무한한 감사와 행복을 느끼는 것. 그것이 인생 학습이다. 그것이 자비이다.

그러한 학습을 바탕으로 옳고 그름을 보면 그 판단의 잣대로 누군가를 피 흘리게 하는 일이 생기지 않는다. 아무리 누군가를, 무엇인가를 비난한다 해도 그 비난은 이 자리, 이 상황에서 그러할 뿐, 본디는 아무 문제 없는 온전한 존재들인 것이다. 이러한 것을 인식하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많아진다면 법계는 그만큼 더 평화로워진다.

낙수(樂受) 위에 사수(捨受)를 하라.
낙수 없는 사수는 우울증을 부른다.
카리스마의 기초는 행복이다.


조건으로 생겨나는 낙(樂)을 뛰어넘어 사수(捨受)라는 존재 본래의 무조건적 평안을 누리려면 먼저 낙수(樂受)의 문이 열려야 한다. 즐거운 느낌은 초월의 느낌으로 가기 위한 따스한 예열(豫熱) 작용과 같다. 따스함이 없는 투명함은 싸늘하다. 각자(覺者)란 존재의 절대 긍정성을 깨달아 섬세하게 행복하고 그 행복의 에너지를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 주는 사람이다.
천하의 모든 전쟁과 지옥을 만들어 내는 것은 오직 ‘나’에 대하여, ‘그것’에 대하여 ‘있다’는 관점을 취함에서 온다. 그렇다면 모든 고통과 싸움을 종식시키기 위해 어찌해야 할 것인가. 없음의 관점, 공(空)의 관점을 깨닫고 학습하는 것이 길이다.

모든 것은 학습해야 한다. 깨달음도, 즐거움도, 행복도. 우리에게 번뇌를 일으키는 우리의 악습(惡習)이 우리의 ‘습’이 된 것은 끊임없는 학습, 인류사를 통하여 닦아 온 학습의 결과였다. 그러니 이번엔 악습을 떠나는 학습, 행복을 누리는 학습, 이고득락(離苦得樂)을 학습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_최용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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