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10주년 맞은 사이펀] 시인들이 가장 사랑한 시는 ‘서시’

박상봉 사회부장 기자

등록 2026-03-20 15:28

계간 『사이펀』, 창간 10주년 맞아 시인 200명 설문 공개

작고 시인 중 백석과 기형도 선호

AI 시 창작, 78.5%가 부정 반응


창간 10주년 맞은 사이펀 봄호 표지(사진=사이펀 제공)부산에서 발간되는 시 전문 계간지 『사이펀』이 창간 10주년을 맞아 국내 시인들의 취향을 집약한 설문 결과를 발표했다. 이번 조사는 2025년 10월부터 11월까지 진행됐으며, 현재 창작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시인 200명이 참여했다. 응답자는 남성 99명, 여성 101명으로 구성됐다.


설문은 시인의 형성과 취향을 다각도로 들여다보기 위해 마련됐다. 등단 경로를 비롯해 등단 이전에 좋아했던 시인, 현재 가장 선호하는 시인, 기억에 남는 작고 시인, 가장 좋아하는 시 한 편, AI 창작에 대한 인식, 애창곡과 기억에 남는 영화 등 총 10개 항목이 포함됐다.


“여전히 고전으로 돌아간다”


조사 결과, 시인들의 등단 경로는 문예지 신인상이 66.5%로 가장 높게 나타났고, 신춘문예는 13.5%에 그쳤다. 이는 여전히 문예지 중심의 등단 구조가 강하게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등단 이전에 영향을 받은 시인으로는 김수영, 백석, 기형도, 서정주, 윤동주, 김춘수, 한용운, 정지용 등이 고르게 언급됐다. 특히 한국 현대시의 초기 및 중기 시인들이 높은 비중을 차지해, 현재 시인들의 감수성이 여전히 전통적인 시적 유산 위에 놓여 있음을 확인하게 한다.


백석·기형도, 여전히 ‘현재진행형’


‘가장 기억에 남는 작고 시인’ 항목에서는 백석과 기형도가 나란히 1위를 차지했다. 두 시인은 각각 다른 방식으로 현대시의 정서를 구축했지만, 세대를 넘어 지속적으로 재독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된 영향력을 보였다.


현재 활동하는 시인 가운데 선호도가 높은 작가로는 이성복, 김혜순, 송찬호, 최승자, 진은영, 강은교 시인 등이 두루 언급됐다. 이들은 각기 다른 시적 경향을 대표하면서도 동시대 시단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는 작가들이다.


창간 10주년 설문조사를 소개하는 책 내부 지면 모습(사진=사이펀 제공)‘가장 좋아하는 시’ 1위는 윤동주 ‘서시’


시인들이 직접 꼽은 ‘최애 시’에서는 윤동주의 「서시」가 가장 많은 선택을 받았다. 이와 함께 강은교의 「빗방울 하나」, 기형도의 「안개」, 백석의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김춘수의 「꽃」 등이 상위권에 올랐다.


특히 특정 작품이 아니라 작가 전체로 보면 백석 시인이 가장 많은 지지를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어 김혜순, 김수영 시인이 뒤를 이었다.


AI 시 창작에 대한 경계감


최근 문학계의 화두인 인공지능 창작에 대해서는 신중하거나 부정적인 시각이 우세했다. ‘긍정적이지만 우려된다’는 응답이 33%, ‘부정적이지만 흐름상 불가피하다’는 의견이 35%로 나타나, 전체의 68%가 일정 수준 이상의 경계심을 드러냈다.


또한 AI가 인간의 시적 정서를 온전히 구현하기 어렵다는 응답이 54.5%로 과반을 차지했다. 공모전과 문단 질서를 혼란스럽게 할 수 있다는 우려도 24%에 달했다. 종합하면 78.5%의 시인들이 AI 시 창작에 대해 불안 또는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AI를 실제로 활용해 본 경험에 대해서는 68.5%가 ‘없다’고 답했으며, 일부 경험자들 역시 실험적 수준에 그친 것으로 나타났다.


노래와 영화, 감수성의 또 다른 지도


시인들이 애창하는 노래로는 「봄날은 간다」, 「개여울」, 「모란동백」, 「킬리만자로의 표범」, 「세월이 가면」, 「한계령」 등이 꼽혔다. 대체로 서정성과 회고성이 짙은 곡들이 다수를 차지했다.


기억에 남는 영화 역시 고전 외화가 중심이었다. 「닥터 지바고」를 비롯해 「일 포스티노」, 「벤허」, 「시네마 천국」, 「러브 스토리」 등이 언급됐으며, 국내 작품으로는 「박하사탕」이 유일하게 이름을 올렸다.


시인들이 좋아하는 시인 12인의  신작과 근작시를 게재했다.


시인들의 선택, 그리고 현재의 좌표


이번 조사와 함께 『사이펀』은 시인들이 선호하는 작가로 선정된 강은교, 김준태, 송재학, 송찬호, 신용목, 이규리, 이장욱, 이하석, 조용미, 진은영, 천양희, 황인찬 등 12인의 신작과 근작시를 함께 수록했다.


또한 주목 시집으로 송진의 『워프 워프 더 워프』를 선정해 대표작과 신작, 평론을 함께 실었다.


배재경 『사이펀』 대표는 “이번 설문은 동시대 시인들의 문화적 배경과 감수성을 독자들에게 전달하기 위한 시도”라며 “시인들이 무엇을 읽고, 듣고, 기억하는지를 통해 현재 한국 시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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