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한국 영화와 문학의 포스트모더니즘 대표작
경마장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은유
한 나무가 수백 나무 꿈꾸는 고배당 노리는 벚꽃 화사하다
꽃 피는 경마장
함민복
경마장으로 건너가는 애마교 입구
비상하는 청동마상 두필
앞발이 허공을 힘차게 딛고 있는
그림자 밟으며
모든 비상의 첫발은 허공을 짚는 것이라고
희망에 중독된 사람들 우르르 몰려간다
정보지를 뒤적이며
지갑을 점검하며
걸인의 바구니에 반짝 동전을 떨구며
주차장 사이사이
한 나무가 수백 나무 꿈꾸는
고배당 노리는 벚꽃 화사하다

함민복의 「꽃 피는 경마장」은 경마장을 욕망의 공간이 아니라 희망이 과잉 생산되는 장소로 바라본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시인은 애마교 입구의 청동마상을 바라보며 “모든 비상의 첫발은 허공을 짚는 것”이라고 말한다.
출발은 언제나 공중에 발을 딛는 행위라는 통찰은, 인간이 확실한 근거 없이 미래를 향해 베팅한다는 사실을 은유한다. 정보지를 뒤적이고 지갑을 점검하며 동전을 떨어뜨리는 사람들의 모습은 결코 특별한 풍경이 아니다.
그들은 실패를 예감하면서도 여전히 기대를 버리지 못하는 존재들이다. 특히 “한 나무가 수백 나무 꿈꾸는 고배당 노리는 벚꽃”이라는 구절은 확률과 환상이 뒤섞인 경마장의 풍경을 압축한다. 벚꽃은 자연의 개화이지만 동시에 인간 욕망의 폭발을 상징한다. 꽃이 피는 순간은 아름답지만, 그 아름다움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희망 또한 비슷한 방식으로 피었다가 쉽게 흩어진다.
영화 《경마장 가는 길》 속 인물들이 반복해서 관계의 가능성에 베팅하는 모습은 이 시의 풍경과 자연스럽게 겹쳐진다. R과 J의 관계는 이미 균열이 시작되었음에도 계속해서 다시 시작될 수 있다는 환상을 만든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서로에게 기대를 걸지만, 그 기대는 점점 확률의 언어로 변한다. 누군가는 감정에 베팅하고, 누군가는 기억에 베팅하며, 결국 관계는 하나의 경주처럼 진행된다. 함민복의 시에서 벚꽃이 고배당을 꿈꾸듯 피어나고, 영화 속 사랑 역시 가능성의 확률 위에 놓여 있다. 아름답게 피어나는 장면과 무너지는 결과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점에서, 경마장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낸 운명의 은유로 읽힌다.
문제작 하일지의 포스트모더니즘 소설 『경마장 가는 길』표지
1990년대 한국문학의 지형을 바꾸어 놓았다고 평가되는 문제작 하일지의 포스트모더니즘 소설 『경마장 가는 길』은 사랑을 다룬 소설이 아니라 관계의 해부학에 가까운 작품이다.
프랑스 유학 시절 동거했던 R과 J는 귀국 이후 다시 만나지만, 그들의 관계는 더 이상 사랑의 이름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R은 이미 가정이 있는 유부남이고, J는 그 관계를 거부하면서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 두 사람 사이의 감정은 애정과 집착, 설득과 협박, 기억과 계산이 뒤엉킨 채 계속 미끄러진다. 사랑이라는 말이 반복될수록 그 말의 실체는 점점 공허해진다.
이 소설이 충격적인 이유는 사랑을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논리의 문제로 끌어내렸기 때문이다. R은 끊임없이 논리를 만들어내며 관계의 정당성을 주장한다. 그는 사랑을 증명하려 하고, 관계를 설계하려 하며, 결국 감정을 계약처럼 다룬다. 그가 J에게 요구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동의에 가깝다. 그래서 독자는 그들의 대화를 따라가다 보면 마치 끝없는 변론을 듣는 느낌을 받는다. 사랑이 아니라 설득의 문장이 이어지고, 설득은 결국 협박의 형태로 변질된다.
J 또한 단순한 피해자가 아니다. 그녀는 거절하면서도 완전히 관계를 끊지 않는다. 거리를 두면서도 다시 가까워지고, 냉정한 태도를 취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물러선다. 두 사람의 관계는 끊임없이 진자 운동을 반복한다. 밀어내고 끌어당기는 움직임이 반복되면서 독자는 어느 순간 이 관계가 사랑 때문인지, 아니면 사랑이라는 말 때문에 유지되는 것인지 혼란에 빠진다. 그들의 관계는 마치 화성에서 온 남자와 금성에서 온 여자가 아니라,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두 존재의 충돌처럼 보인다.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R이 J의 문학평론 당선을 둘러싸고 돈을 요구하는 장면이다. 사랑의 기억은 순식간에 계산의 언어로 변한다. 관계의 감정적 흔적이 금액으로 환산되는 순간, 독자는 사랑이라는 말이 얼마나 쉽게 거래의 형식으로 바뀔 수 있는지를 목격한다. 이 장면은 인간 관계의 윤리적 기반이 얼마나 허약한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사랑의 기억조차 협상의 재료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은 독자를 불편하게 만든다.
장선우 감독 영화《경마장 가는 길》포스터
이 작품은 1991년 영화로 만들어졌다. 영화《경마장 가는 길》은 하일지의 소설 『경마장 가는 길』을 원작으로 한 장선우 감독 작품으로, 프랑스 유학 시절 동거했던 남녀의 뒤틀린 관계를 통해 사랑과 욕망, 소유와 집착의 본질을 집요하게 파헤친 문제작이다.
주인공 R(문성근)은 프랑스 유학 중 만난 J(강수연)와 함께 동거하며 연인 관계를 맺는다. 그러나 학업을 마친 뒤 두 사람은 한국으로 돌아오고, 현실은 과거의 관계를 그대로 허용하지 않는다. R에게는 이미 아내와 아이가 있고, J는 대학 강의를 준비하며 자신의 삶을 정리해가고 있다.
R은 여전히 J와의 관계가 지속되기를 바라며 서울과 대구를 오가며 그녀를 집요하게 찾아간다. 하지만 J는 점점 그를 피하고 거리를 두려 한다. 두 사람은 만나면 서로의 감정을 확인하기보다 논쟁과 설득을 반복한다. 사랑을 주장하는 R과, 관계를 정리하려는 J 사이의 대화는 점점 감정이 아닌 논리 싸움으로 변해간다.
영화《경마장 가는 길》한 장면
그러던 중 R은 자신이 써준 글을 바탕으로 J가 문학평론 공모에 당선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 공로를 이유로 돈을 요구한다. 사랑의 기억은 계산의 언어로 변하고, 관계는 더욱 왜곡된다. 두 사람은 다시 육체적으로 가까워지기도 하지만, 그 관계는 이미 신뢰가 무너진 상태다.
결국 R은 집착과 상처가 뒤섞인 상태로 현실에서 밀려나듯 떠나게 되고, 두 사람의 관계는 파국에 가까운 여운을 남긴다. 영화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관계가 얼마나 쉽게 소유와 지배의 욕망으로 변하는지를 냉정하게 보여준다.
이 작품은 전통적인 멜로드라마와 달리 감정의 미화를 거부하고, 인간 관계의 불편한 진실을 드러낸다. 사랑이 순수한 감정이라기보다 권력 관계 속에서 작동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며, 1990년대 한국 영화와 문학의 포스트모더니즘적 흐름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영화《경마장 가는 길》한 장면
박상봉 사회부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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