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間島회복’을 위한 작은 씨앗

중국의 고구려사 탈취 움직임과 일본의 독도 망언 등 분통터지는 일만 잇따르고 있는 가운데 오랜만에 민족의 뿌듯한 자긍심을 느껴볼 수 있었다는 소감이었다. 한 독자는 구한 말 청나라와의 감계(勘界·국경획정)협상에서 간도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버틴 이중하(李重夏)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자세히 소개해달라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중하(1846~1917). 역사인물 사전에 따르면 그는 36살에 병과에 급제해 안변도호부 부사, 대구 부관찰사 등 주로 지방관직을 전전했다. 또 일본의 한반도 찬탈 야욕이 노골화되는 1909년 국시유세단(國是遊說團)을 조직, 저항 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우리 역사에 남긴 족적은 1885년과 1887년 두차례 벌어진 조·청(朝淸) 감계협상의 조선 대표로 임명됐을 때 가장 두드러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의 영토를 압록강과 두만강 안쪽으로만 국한시키려는 청나라측의 주장에 이중하는 송화강 동쪽의 간도 땅은 양보할 수 없는 우리땅이라며 강인하게 버텼다. 특히 함경도 회령에서 있었던 2차 협상에서 청나라측 대표단이 협상장에 군대를 끌고 와 협박하자 그는 “내 머리는 잘라갈 수 있을지언정 우리 국토는 잘라갈 수 없을 것”이라며 그들의 제의를 단호히 거절했다.
이스라엘 건국운동 당시 유태인들의 가슴에 새겨졌던 “이 땅은 하늘이 우리에게 주신 것. 내 마지막 한 방울의 피를 다 바쳐 지켜나가리”라는 유명한 다짐글에 비견될 만한 비장함이 느껴지지 않은가.
죽음을 각오한 배짱과 단호함은 보통의 애국심이나 사명감만으로는 우러나오지 않는다. 확고한 신념체계 없이는 불가능하다. 차라리 내목을 자르라고 일갈한 이중하는 분명 간도가 우리땅이라는 사실을 굳게 믿고 있었다. 1712년 청나라 오라총관(烏喇總官) 목극등(穆克登)과 조선관헌들에 의해 세워진 백두산 정계비에 ‘토문강(土門江)을 국경으로 한다’는 문구가 들어있으며, 그 토문강은 백두산에서 발원돼 북쪽으로 흘러 가는 송화강(松花江)의 지류임을 그는 여러 차례 현지 답사 끝에 확인한 것이다.
그런데 청나라 측은 토문강은 곧 도문강(圖門江), 즉 현재의 두만강이라고 우겼다. 토문, 도문, 두만이 모두 ‘새가 많이 모여드는 골짜기’라는 여진족 말에서 연유된 것으로 백두산 정계비 설치 당시 목극등이 토문과 두만을 착각한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이중하는 목극등이 조선 역관에게 말한 “대국산천은 다 줄 수 없으나 백두산은 너희나라이니 어찌 주기 어렵겠느냐”고 말했다는 기록과 토문강 수맥을 따라 만들어진 돈대(墩臺) 등 경계표지를 근거로 반박했다. 결국 협상은 결렬되고 간도의 귀속문제는 어정쩡한 상태로 있었으나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탈취한 일본 제국주의가 1909년 청나라와 간도협정을 체결함으로써 한민족의 활동무대는 두만강 이남으로 제한되고 말았다.
간도 회복운동은 간도협정이 무효라는 점에서 출발한다. 물론 이 사실을 국제사회에서 인정받기는 지난한 작업이다. 또 중국이 중화 민족주의를 내세워 마치 블랙홀처럼 주변국의 역사까지 빨아들이려고 하는 이때 그들로부터 간도를 되찾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데 왜 이런 상황에서 엉뚱한 간도 되찾기냐고 혹자는 핀잔을 줄지 모른다. 공연히 민족주의의 발톱을 드러내 중국을 자극해서는 득보다 실이 클 것이라는 논리도 일리가 있다.
하지만 꿈은 꿔야 한다. 유태민족의 고토(故土)회복 운동 시오니즘은 19세기 말 유태계 헝가리 언론인 테오도르 헤르즐의 작은 꿈에서 잉태됐다. 그 꿈은 1·2차 세계대전 등 격동하는 세계정세 속에서 기적적인 힘을 발휘해 1948년 이스라엘 건국의 열매를 맺었다. 간도 회복에도 아마 엄청난 고난과 우여곡절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 말하기를 “시작은 미미하지만 끝은 창대하리라”라고 했다.
최용대 발행인/ 주필
기자
헤드라인 뉴스
한국매일뉴스 © 한국매일뉴스 All rights reserved.
한국매일뉴스의 모든 콘텐츠(기사 등)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