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칼럼] 시간의 결을 품은 돌, 신앙을 새기다 -청암 배성근-

이원희 보도본부/ 편집국장 기자

등록 2026-05-17 15:44

— 산청 범학리 삼층석탑을 바라보며




 경남 산청의 들녘에서 시작된 한 기의 석탑, 산청 범학리 삼층석탑은 천 년의 시간을 건너 오늘도 우리 앞에 서 있다. 통일신라 9세기, 불교 문화가 가장 깊고 넓게 뿌리내렸던 시기의 산물인 이 탑은 단순한 석조 구조물이 아니다. 그것은 신앙의 형상이며, 예술의 응결이고, 한 시대의 정신이 응축된 시간의 결정체다.


이 석탑은 이른바 ‘이층 기단 위 삼층 탑신’이라는 통일신라 석탑의 전형적 구성을 따른다. 안정감 있게 쌓아 올린 기단 위에 균형 잡힌 탑신이 오르며, 절제된 선과 비례가 만들어내는 고요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단순함 속에서 완성을 이루는, 통일신라 조형 미학의 정수가 이 안에 깃들어 있다.


그러나 이 탑의 진정한 가치는 형식에 머물지 않는다. 재료에서부터 이미 특별하다. 국내에서 드물게 사용된 섬장암은 세월이 흐를수록 오히려 깊이를 더하는 질감과 색을 지니며, 돌 자체가 시간의 층위를 드러내는 매체가 된다. 이는 단순한 건축 재료를 넘어, 시간을 품는 그릇으로서의 돌을 말해준다.


조형의 절정은 조각에서 드러난다. 하층 기단을 둘러싼 무장 신장상은 갑옷과 무기를 갖춘 채 사방을 지키고 있다. 이들은 장식이 아니라, 불법을 수호하는 상징적 존재로서 탑 전체에 긴장과 생명력을 부여한다. 돌에 새겨진 이들의 표정과 자세는 지금도 살아 있는 듯한 힘을 발산한다.


그 위, 1층 탑신에는 공양하는 보살상 네 구가 자리한다. 특히 정면의 보살상만이 전면을 응시한다는 점은, 시선마저 하나의 조형 언어로 활용되었음을 보여준다. 신장상과 보살상이 한 탑 안에서 유기적으로 결합된 구성은 매우 이례적이며, 당시 불교 조각의 상상력과 상징 체계가 얼마나 풍부했는지를 말해준다.


이처럼 산청 범학리 삼층석탑은 단순한 석탑을 넘어, 통일신라 후기 석탑 양식의 중요한 기준점이 된다. 구조와 조각, 형식과 의미가 긴밀히 결합된 이 작품은 장인들의 기술적 완성도뿐 아니라 정신적 깊이까지 증언하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현재 이 석탑은 진주성 내 박물관 인근으로 옮겨져 관리되고 있다. 원래의 자리에서 떠났지만, 그 의미까지 이동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많은 이들과 만나며, 과거와 현재를 잇는 새로운 장소성을 획득했다.


전주성 내 박물관 앞 관리중인 삼층석탑 


우리는 문화유산을 흔히 ‘지켜야 할 대상’으로만 여긴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에 머무는 유물이 아니라,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다. 천 년 전 돌에 새겨진 신앙과 염원은 오늘의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무엇을 남기고 있는가. 그리고 어떤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가.


돌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다. 다만, 그 의미를 읽어내는 것은 언제나 오늘을 사는 우리의 몫이다.




시와 늪 대표 배성근(시인, 수필, 소설, 평론(비평). 칼럼리스트)

이원희 보도본부/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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