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honey] 고창여행 2題, 보리밭과 읍성
(서울=연합뉴스) 이동경 기자 = 고창의 푸른 청보리밭 사잇길과 고창읍성의 성곽길. 시골 유년 시절의 기억을 마음껏 떠올려 본다. 왜구의 침입에 대비한 조상들의 슬기를 느낀다. 고창이 품고 있는 그곳들을 다녀왔다.
청보리밥 정자[사진/임헌정 기자]
◇ 아스라한 기억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뉘 부르는 소리 있어 나를 멈춘다…'
가곡 '보리밭'에서 뉘 부르는 소리는 유년 시절의 기억이 부르는 소리가 아닐까.
그 많은 보리밭은 어느 순간부터 아파트 단지가 되고 공장 부지로 변했다.
차츰 종적을 감춰가지만, 기억은 아스라이 남아있다.
보리수염이라고 불렀던 까락이 바람에 일렁이며 사각대는 소리도 그렇다.
청보리밭 사진 촬영 장소[사진/임헌정 기자]
◇ 보릿고개
전북 고창군 공음면 학원(鶴園)농장에는 보리밭 축제가 한창이다. 예전에 학들이 많아서 학원이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뭐 하러 이런 데를 와. 보리라면 아주 지긋지긋한데." 가족 여행을 온 80대 노인이 자식들에게 농담 반 진담 반 푸념한다. 가난했던 시절 보릿고개의 고된 추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으리라.
보릿고개라는 의미인 '맥령'(麥嶺)이라는 말은 조선 정조 때 처음 등장했다. 맥령은 묵은 곡식이 다 떨어지고 햇보리는 아직 여물지 않은 음력 4~5월, 농민들이 극심한 식량난을 겪던 시기를 의미했다. 백성들에게는 해마다 반복되는 가장 혹독한 계절이었다.
보리밭은 지금 멋진 스마트폰 사진의 배경이 되는 곳이지만, 그 앞에서 눈물을 흘린 우리네 조상들이 있었다.
청보리밭 풍경[사진/임헌정 기자]
◇ 지평선과 맞닿은 푸르름
오늘날 고창의 보리밭은 굶주림의 기억이 아니라 새파란 봄의 풍경이다. 한 무리의 관람객이 노인의 '보릿고개 푸념'에 한바탕 웃음을 지은 뒤 보리밭 사잇길로 우르르 들어갔다.
구릉을 뒤덮은 푸른 보리밭 물결이 지평선에 맞닿는다. 이 일대 30만평의 보리밭 가운데 유채꽃밭을 둘러싼 15만평이 축제장으로 조성됐다. 그때그때 경관이 예쁘고 좋은 코스를 선택해 2.5㎞ 정도의 사잇길을 낸다.
사진을 찍으면서 천천히 돌면 1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노을길'과 '마중길' 등 4가지 길 중에 '보리밭 체험길'이 단연 인기다.
까락을 손바닥으로 스쳐보면서 사잇길을 따라간다. 까락은 까끄라기의 준말이다. 초등학교 때의 보리밭 숨바꼭질 추억이 손바닥에서 뇌리로 전해온다. 잠시 눈을 감았다. 그제야 보리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언덕배기에 있는 원두막 정자 옆을 빨간 양산 하나가 지나간다. 새파란 하늘과 맞닿은 청록색 물결에 떠 있는 빨간 풍선 같았다. 사잇길을 돌다 보면 나무 움막 등 드라마 촬영지가 잇달아 나타난다. 관람객들의 흥미로운 '인증샷' 포인트다. 고창 보리밭은 연간 50여편의 방송, 드라마, CF 등을 찍는 장소다.
쌀보리[사진/임헌정 기자]
◇ 겉보리와 쌀보리
사잇길 안에 왕대로 조성된 울타리를 따라 언덕을 넘어간다.
"여기부턴, 울타리가 없습니다. 낭만만 있을 뿐…"이라는 안내판이 나온다. 울타리를 없애 자연의 보리밭 그대로는 느끼게 한 코스다.
그런데 언덕 뒤편에 군데군데 보리들이 까락 끝을 떨군 채 바람 부는 쪽으로 허리가 흉하게 꺾여있다. 겉보리들이다. 겉보리는 까락이 길지만, 쌀보리는 까락이 짧다. 까락이 물기를 머금고 바람을 맞으면, 그것이 긴 겉보리가 잘 쓰러진다고 한다.
까락을 몇가닥 꺾어 추억을 담던 중년 여성들이 축제 관계자들로부터 "가방에 넣으세요. 다음부터는 꺾지 마세요"라는 주의를 듣는다.
청보리밭 안내 표지판[사진/임헌정 기자]
◇ 연중 23일의 시간
보리밭 구경은 이른바 '타이밍'이다. 보리가 가장 푸른 시기는 4월 중순부터 5월 초 사이 약 23일간이라고 한다. 그래서 축제도 23일간 열린다. 풍성한 유채꽃과 보리를 함께 볼 수 있는 최적기는 4월 20일부터 닷새 정도다.
보리 수확은 6월 초부터 열흘간 이뤄진다. 수확이 끝난 보리밭에는 여름부터 가을까지 해바라기, 백일홍, 메밀꽃, 코스모스 세상으로 탈바꿈한다.
사잇길을 다 돌 무렵 갑자기 웽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유채꽃의 꿀과 꽃가루를 모으러 다니는 벌들이다. 녀석들은 꿀과 꽃가루 모으기에 바빴다. 보리밭 구경꾼들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인다.
보리밭을 돌고 학원농장이 운영하는 식당의 보리 비빔밥을 맛보지 않을 수 없었다. 어릴 적 부끄러워 감추고 싶었던 양은 도시락 속의 꽁보리밥을 떠올리며 고추장을 듬뿍 넣고 비볐다. 보리밭 속에서 보리밥을 먹을 줄이야.
청보리밭 드라마 촬영지[사진/임헌정 기자]
◇ 유비무환의 슬기, 고창읍성
보리밭을 뒤로 하고 고창읍내로 들어서면 파란 지평선 대신 나지막한 성벽이 시야에 들어온다. 국내에서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것으로 평가받는 고창읍성이다. 일명 모양성(牟陽城)이라고도 한다.
조선 단종 원년(1453년)에 쌓은 자연석 성곽이다. 왜구의 침입을 막고자 전라도민들이 자발적으로 쌓아 호남내륙을 방어하는 전초기지 역할을 했다. 유비무환 슬기를 실현한 것이다.
반듯하게 다듬어진 돌이 아니라 저마다 생김새가 다른 돌들이 풍화를 견디며, 서로를 받치며 수백 년을 버텨왔다. 거무튀튀한 성벽의 돌들은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다.
동,서,북문과 3개의 옹성, 6개의 치성을 비롯한 성 밖의 해자 등 전략적 요충시설이 두루 갖추어져 있다. 성내에는 동헌과 객사 등 22동의 조선시대 관아 건물이 있었으나 정유재란 등 전란을 겪으며 소진이 많이 됐다. 조선시대 감옥이 있던 자리에 조성된 '옥'(獄)에 눈길이 갔다.
고창읍성 동문[사진/임헌정 기자]
◇ 성곽 위의 '스릴'
성곽 위에는 관람객들이 걸을 수 있도록 시멘트 길이 조성돼 있다. 보수 공사 중인 서문 쪽에서 성곽에 올랐다. 성곽의 높이는 4~6m, 둘레는 1.7km. 한 바퀴를 천천히 돌면 30~40분이 걸린다.
성곽 위에서 내려다보는 고창읍은 고요하다. 낮은 지붕들이 촘촘히 이어진다.
그런데, 걷다 보면 일종의 스릴을 느낀다. 전란의 역사가 떠올라서이기도 하지만 다른 이유가 있다. 성곽 위에는 난간이 없다. '먼 산'을 보다가 발을 헛디디면 5m 아래로 추락한다. 곳곳에 추락을 경고하는 표지판도 있다.
성곽 위를 돌다 보면 성 밖으로 가지를 길게 뻗어 내보낸 아름드리 노송들을 많이 마주친다. 모양이 멋지지만, 성곽 위로 낮게 뻗은 가지는 걷는 이들의 머리를 위협한다. 발밑만 보다가는 가지에 부딪히기 십상이다.
고창읍성 공북문 입구 답성놀이 조형물[사진/임헌정 기자]
고창읍성에는 답성놀이라는 독특한 풍습이 전해진다. 성을 밟으며 한 바퀴 돌면 다릿병이 낫고, 두 바퀴 돌면 무병장수하며, 세 바퀴를 돌면 극락에 간다고 한다. 부녀자들 머리에 돌을 이고 성을 도는 행렬이 전통 방식이다.
매년 고창읍성을 즐기는 축제인 모양성제 기간에는 답성행렬이 거행된다. 성을 지켜온 사람들의 신앙이었고 놀이였을 터다. 한 바퀴를 돌았으니 아픈 무릎이 다 나았기를 기도해본다.
고창군에는 읍성이 하나 더 있다. 고창읍성보다 40년 앞선 무장면의 무장읍성이다. 1894년 전봉준이 동학농민운동의 포고문을 발표한 역사의 현장이다. 고창은 두 성을 함께 품고 있다.
고창 고인돌 유적지 입구의 고인돌[사진/임헌정 기자]
◇ 세계유산의 도시
고창은 고인돌과 갯벌, 판소리 등 유네스코가 인정한 세계의 문화, 자연, 무형유산 등 7가지의 보물을 간직한 곳이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이 고인돌 유적지다. 청동기시대의 지석묘인 고인돌이 국내에서 가장 많다. 무려 1천748기가 산재한다.
죽림리에 있는 유적지에서는 순환버스인 '모로모로열차'에 어르신들이 꽉 차 있었다. 어버이날을 하루 앞둔 효도관광을 온 듯했다. 이 버스를 타고 제3코스에서 내리면 300t에 달하는 동양 최대의 고인돌을 볼 수 있다.
고인돌 유적지를 나와 선운사로 향하는 길에 마치 호리병을 거꾸로 세워놓은 듯한 모양의 바위를 만났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지질공원이다. 화산재와 용암이 굳어져 만들어졌다고 한다.
고창의 독특한 지형에 새삼 놀라게 된다.
선운사 만세루[사진/임헌정 기자]
◇ 선운사, 평화로운 공간
아무리 자주 왔다고 해도, 시간이 없다고 해도 저 유명한 선운사를 어떻게 지나치랴.
동백꽃이 통째로 툭 떨어지고 난 뒤의 선운사. 동백 대신 신록이 절을 감싸고 있다. 선운사는 꽃이 질 때가 더 아름답다는 말도 있다.
도솔천을 따라 이어지는 숲길에는 물소리와 새소리가 섞이고, 공기는 갑자기 서늘해진다. 보리밭과 고창읍성이 햇빛 아래 열린 공간이라면, 선운사 가는 길은 조용히 닫히는 느낌이다.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느려졌다.
경내에 옹기종기 달린 소원 종이 바람에 흔들려 분주한 소리를 냈다. 그래서 더 고요한 느낌이었다.
대웅전 처마 아래로 쏟아지는 햇살을 안아본다.
5월의 고창은 푸르고, 아름다웠다.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6년 6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hopema@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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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희 보도본부/ 편집국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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