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기타로 쓴 청춘의 고뇌…고전의 갑옷 벗은 연극 '갈매기'

이원희 보도본부/ 편집국장 기자

등록 2026-07-25 13:27

국립극단·충북도립극단 공동기획…'심리적 고립' 형상화한 무대 눈길


원작에 덧붙인 입체적 캐릭터 해석…현대인의 불안·상실에 깊은 울림


연극 '갈매기' 무대연극 '갈매기' 무대 (서울=연합뉴스) 임순현 기자 = 국립극단과 충북도립극단이 공동기획한 연극 '갈매기'를 찾은 관객들이 공연의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 2026.07.24 hyun@yna.co.kr


(서울=연합뉴스) 임순현 기자 = 무대 뒤에서 총성이 울리고, 공연장이 순식간에 암전된다. 객석 곳곳에서 헛헛함을 억누르지 못한 감정이 탄식으로 새어 나온다.


24일 저녁 서울 명동예술극장. 객석을 가득 메운 관객들 사이로 잔잔한 긴장감이 흘렀다. 국립극단과 충북도립극단이 공동기획한 연극 '갈매기' 첫 공연의 막이 오르자, 무대 위에는 체호프의 고전이 아닌 오늘의 언어와 감각으로 다시 태어난 '갈매기'가 펼쳐졌다.


사랑과 예술, 인정욕구와 엇갈린 욕망 속에서 방황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그린 이 작품은 러시아의 한 시골 호숫가 별장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각자의 꿈과 현실, 사랑과 좌절이 교차하는 인간 군상의 드라마다.


주인공 트레플레프는 연인 니나를 주인공으로 한 연극을 준비하지만, 어머니 아르카지나의 냉소와 무관심에 절망한다. 게다가 어머니의 연인이자 유명 소설가 트리고린에게 니나가 끌리면서 깊은 상실감에 빠진다. 트레플레프를 떠나 트리고린을 찾아간 니나는 배우로서의 성공과 사랑을 꿈꾸지만 결국 트리고린에게 버림받고, 트레플레프 역시 절망 끝에 비극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트레플레프 역의 오영석과 니나 역의 이다해트레플레프 역의 오영석과 니나 역의 이다해 (서울=연합뉴스) 임순현 기자 = 국립극단과 충북도립극단이 공동기획한 연극 '갈매기'의 트레플레프 역 오영석과 니나 역 이다해가 공연을 마치고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2026.07.24 hyun@yna.co.kr


공연이 시작되자마자, 트레플레프가 직접 연주하는 전자기타의 라이브 선율이 공연장 안을 가득 채웠다. 체호프의 시대와는 전혀 다른 이 낯선 음악은 현대인의 불안과 고독을 절묘하게 대변했다. 무대 위로 길게 일렁이는 그림자들은 인물들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처럼 느껴졌다.


이번 공연에서는 무대의 미장센을 단순한 배경을 넘어, 인물들의 내면을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수단으로 활용했다. 흰색 풍의 무대 위로 드리워진 그림자와 빛의 대비와 상하로 분리된 공간은 각 인물의 심리적 고립과 소통의 부재를 상징적으로 드러냈다. 특히 2층 무대에서 내려다보는 시선과 1층에서 올려다보는 시선이 교차할 때마다, 관객은 인물들 사이의 심리적 거리감을 더욱 선명하게 체감할 수 있었다.


이번 공연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점은 주·조연을 가리지 않는 입체적 캐릭터 해석이었다. 충북도립극단 단원들의 안정적인 앙상블은 각 인물의 모순과 결핍, 인간적 약점을 생생하게 드러냈다. 특히 트레플레프를 짝사랑하는 마샤는 기존의 어둡고 수동적인 이미지를 벗고, 자신의 욕망을 당당히 직시하는 현대적 여성상으로 탈바꿈했다. 하인 야코프는 트레플레프와 아르카지나의 갈등을 묵묵히 지켜보는 관찰자로서 극의 깊이를 더했다. 트리고린 역시 창작의 고통과 유명세의 강박에 시달리는 예술가의 내면을 섬세하게 표현해, 관객의 몰입을 이끌었다.


아르카지나 역의 이채윤아르카지나 역의 이채윤 (서울=연합뉴스) 임순현 기자 = 국립극단과 충북도립극단이 공동기획한 연극 '갈매기'의 아르카지나 역 이채윤이 공연을 마치고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2026.07.24 hyun@yna.co.kr


원작 '갈매기'는 19세기 러시아의 사회적 맥락과 인간 군상의 보편적 고뇌를 담고 있다. 하지만 이번 무대는 고전의 무거운 갑옷을 벗고, 이를 오늘의 언어와 감각으로 재해석해냈다. 작품의 배경인 호숫가 별장은 더 이상 먼 러시아의 시골이 아니라, 현대인이 살아가는 복잡한 도시의 축소판처럼 느껴졌다.


무대미술과 음악의 현대적 해석도 두드러졌다. 전자기타의 라이브 연주, 미니멀한 무대, 상하로 분리된 공간 등은 원작의 정적이고 자연주의적 분위기와는 확연히 달랐다. 주변 인물의 존재감 강화, 여성 캐릭터의 주체성 부각, 심리적 거리와 소외의 시각화 등은 체호프가 그린 인간 군상의 보편성을 오늘의 현실로 끌어왔다.


공연이 끝난 뒤에도 관객들은 쉽게 자리를 뜨지 못했다. 마지막 장면에서 트레플레프가 절망 끝에 극단적 선택을 하는 순간, 공연장 안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정적에 휩싸였다. 이 장면은 단순한 비극을 넘어, 오늘을 살아가는 모두의 내면에 자리한 불안과 상실에 대해 깊은 질문을 던졌다.


충북도립극단의 젊은 에너지와 국립극단의 노련함이 어우러진 연극 '갈매기'는 다음 달 1일까지 명동예술극장에서 만날 수 있다.


 [국립극단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이원희 보도본부/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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