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김규식을 모른다"…고아출신 유학생 '국제무대'에 독립설파

이원희 보도본부/ 편집국장 기자

등록 2026-08-15 08:40

美로어노크대에 '김규식 센터' 개관한 스텔라 쉬 교수 인터뷰


129년 전 美대학 휩쓴 고아…22세에 졸업 당시'전체 3등' 성적표 남아


로어노크대가 만든 '김규식 엽서'로어노크대가 만든 '김규식 엽서' (서울=연합뉴스) 윤동진 기자 = 지난 11일 오전 서울 중구의 한 카페에서 스텔라 쉬 미국 버지니아주 로어노크대 교수가 '김규식 엽서'를 보여주는 모습. 2026.8.11.


(서울=연합뉴스) 이의진 기자 = "한국은 김구와 이승만은 알아도 김규식에 대해서는 잘 모르더군요. 그는 우리 대학 최고의 동문입니다."


미국 버지니아주 로어노크대 스텔라 쉬 교수는 지난 11일 서울 중구 카페에서 가진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독립운동가 김규식을 이렇게 평가했다.


임시정부 부주석을 지낸 김규식 선생은 서양 선교사 밑에서 자란 고아였다. 천재적 어학 능력을 보인 그는 태평양을 건너 1897년 16세에 로어노크대에 입학했다.


129년이 지난 올해 3월 로어노크대는 '김규식 센터'를 열어 그를 기렸다.


인터뷰하는 스텔라 쉬 로어노크대 교수인터뷰하는 스텔라 쉬 로어노크대 교수 (서울=연합뉴스) 윤동진 기자 = 지난 11일 오전 서울 중구의 한 카페에서 스텔라 쉬 미국 버지니아주 로어노크대 교수가 '김규식 엽서'를 보여주는 모습. 2026.8.11.


이를 주도한 스텔라 쉬 교수는 미국 대학의 한국사 전문가지만 학자로서 그를 사로잡았던 분야는 고대사였지, 근현대사가 아니었다.


그런 쉬 교수도 2006년 로어노크대 교수직 면접에서 받은 질문을 아직 잊지 못한다. 사학과 학과장이었던 마크 밀러 교수가 이렇게 물었다.


"김규식이라는 사람을 알고 있나요?"


쉬 교수도 김규식 선생이 독립운동가라는 건 알았다. 해방 후 이승만·김구와 함께 우익 진영의 3대 지도자로 꼽힌다는 사실도 얼핏 들은 적은 있었다.


교수로 채용된 뒤에는 김규식과 로어노크대학과의 인연을 자세히 파고들었다.


독립운동가로서 행보뿐 아니라 삶의 역정, 인물 됨됨이에 존경심이 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미국 버지니아주 로어노크대학에 조성된 김규식센터미국 버지니아주 로어노크대학에 조성된 김규식센터 [국가보훈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쉬 교수는 "그는 고난을 인생의 기회로 바꿨다. 천애 고아가 미국 대학을 졸업했다"며 "미국에서 새 인생을 살 수 있었지만, 어려운 조국을 위해 돌아갔다는 점도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세상이 아무리 어지러워도 자신만의 평화와 정의를 잃지 않았다는 점도 있다"고 짚었다. 해방정국 좌우합작·남북협상을 이끌며 극한 대립을 끝내려 한 점을 언급한 것이다.


쉬 교수의 평가처럼 김규식은 1881년 고난과 함께 태어났다. 부친이 정치적 이유로 유배를 가고, 어머니도 곧이어 사망했기 때문이다.


사고무친의 팔자는 선교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를 만나 확 바뀌었다.


언더우드는 굶주림에 친척 집 벽지를 뜯어 삼키려 한 네 살배기 김규식을 외면하지 못하고 자신의 보육원으로 데려왔다.


김규식은 언더우드 밑에서 천부적 재능을 보이며 영어를 금세 통달했다.


이러한 어학 능력덕에 미국 유학생으로도 선택받아 쉬 교수가 재직 중인 로어노크대와 인연도 시작됐다.


쉬 교수는 최근 가장 기뻤던 순간이 홍수로 소실된 줄 알았던 김규식의 옛 성적표가 수십년 만에 캠퍼스에서 발견됐을 때였다고 한다.


1897년 로어노크대에 입학한 김규식은 1년 만에 준 우등으로 예과를 졸업한 뒤 웅변 서클 회장을 맡는 등 학부생으로도 활발히 활동했다.


1903년 졸업 성적은 전체 3등이다. 그의 나이 22세였다.


그의 성취를 확인한 줄리어스 드레허 총장은 1904년 지역 신문에 한국인들에게 교육 기회만 제공되면 독립은 물론, 당대 열강인 일본을 뛰어넘는 국가를 세울 것이라는 전망을 담은 기고문을 쓰기도 했다.


독립운동가 김규식의 파리 고별연설 다룬 1919년 프랑스 일간지독립운동가 김규식의 파리 고별연설 다룬 1919년 프랑스 일간지 (파리=연합뉴스) 김용래 특파원 =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리위원부 대표를 지낸 김규식(1881∼1950)이 파리를 떠나기 직전 서구 열강의 한국 문제에 대한 무관심과 비협조를 외국 지식인들에게 강력히 성토한 내용이 처음 확인됐다.

사진은 김규식이 파리에서 미국으로 출국하기 직전인 1919년 8월 6일 파리외신기자클럽이 주최한 연회에서 연설한 내용이 상세히 기술된 프랑스 일간 '라 랑테른'(La Lanterne)은 1919년 8월 8일자 기사다. 임시정부가 파리에서 펼친 독립운동의 생생한 장면을 확인할 수 있는 희귀자료로 평가된다. 2018.12.24 [재불사학자 이장규 씨 제공·프랑스국립도서관 소장자료]

yonglae@yna.co.kr


쉬 교수는 김규식에게 로어노크대가 '아름다운 시절'이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조선 땅에서 부모 없이 서양 선교사 밑에서 컸다고 멸시받다가, 태평양을 건너서야 자기 능력을 온전히 인정받는 공동체를 만났다는 것이다.


그런 김규식은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에서의 평온한 삶을 단념하고 1905년 귀국했다.


항일운동으로 방향을 튼 그의 결정이 모교로서는 자부심이 됐다.


김규식은 1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1919년에 열린 파리강화회의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총장직을 맡아 전권대사로 참석, 일본의 한국침략을 규탄했다.


그 배경엔 모교에서 갈고닦은 어학과 교양, 변론 능력이 자리 잡고 있었을 것이라고 쉬 교수는 평가했다.


파리 도착 직후 김규식은 사실상 '1인 외교'를 펼쳤다. 연합국과 강화회의 주최 측에 거듭 한국 독립을 위한 청원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유창한 영어로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한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에게 청원서가 전달되도록 미국 관료들에게 거듭 연락하는 등 외교전도 펼쳤다.


동시에 파리의 기자·정치인을 상대로 선전전도 펼쳤다.


버지니아 로어노크대의 김규식 선생 표지판버지니아 로어노크대의 김규식 선생 표지판 [로어노크대 홈페이지 캡처. 재판매 및 DB 금지]


쉬 교수는 "파리강화회의는 열강들의 회의였기 때문에 이런 청원이 수용되지는 않았지만 김 선생은 해야 할 일을 했고, 할 수 있는 만큼 열심히 했다"고 평가했다.


이 같은 행보를 기려 로어노크대는 올해 3월 '김규식 센터'를 열었다. 보훈부·독립기념관 등의 지원으로 캠퍼스 내 6평 정도 공간을 마련해 김규식 관련 기록을 보관·전시하고 있다. 쉬 교수도 광복절을 앞두고 보훈부 초청으로 방한했다.


쉬 교수는 "로어노크대는 작은 대학이지만, 1890년대 시작한 한미 관계를 보여주는 민간 외교의 장이기도 하다"며 "김규식 센터가 독립운동과 관련된 학술·문화 공간으로 쓰이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규식 선생은 1950년 한국전쟁 때 피란을 가지 않고 서울에 남았다가 납북돼 그해 12월 북한에서 숨을 거뒀다.


이원희 보도본부/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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