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 산책(22)] 대추 한 알 ,장석주

권오정 문화부장/ 기자

등록 2026-08-17 08:39



대추 한 알

/ 장석주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게 저 혼자서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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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추 한 알〉은 짧지만 한국 현대시를 대표하는 명시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시의 가치는 대추를 노래한 것이 아니라, 한 생명이 익어 가는 시간의 철학을 보여 준 데 있습니다.

'파고들기, 되새기기, 크게 보기, 꼬리물기, 넓혀보기, 맺어보기, 톺아보기, 나눠보기, 견줘보기'가 모두 살아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시인은 대추를 하나의 열매로 보지 않습니다. 대추 한 알 속에 태풍과 천둥, 무서리와 땡볕, 초승달을 함께 넣어 둡니다.

이것은 자연현상을 나열한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시간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눈앞의 결과보다 그 결과를 만들어 낸 과정을 먼저 보는 시인의 시선입니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 없다."
이 첫 문장은 대추 이야기인 동시에 인간에 대한 선언입니다. 어느 누구도 저절로 성숙하지 않습니다. 성공도, 인품도, 예술도, 사랑도 모두 수많은 시련을 통과한 뒤에야 제 빛을 냅니다.

태풍은 역경이고, 천둥은 충격입니다. 무서리는 견딤이며, 땡볕은 인내입니다. 초승달은 기다림입니다.

시인은 대추 속에서 사계절을 읽고, 한 생애를 읽고, 우주의 시간을 읽어 냅니다. 이것이 사물을 바라보는 시인의 통찰입니다.

이 작품이 더욱 빛나는 이유는 이성과 감성의 조화에 있습니다. 감성만 있었다면 "붉은 대추가 예쁘다."에서 끝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이성적으로 원인과 과정을 분석하고, 감성적으로 그것을 이미지로 승화시킵니다. 분석이 차갑지 않고, 감성이 허공에 떠 있지 않습니다. 두 힘이 만나 하나의 명시를 탄생시킨 것입니다.

우리 역시 사람을 만날 때 겉모습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밝게 웃는 사람에게도 태풍 같은 밤이 있었을 것이고, 묵묵한 사람에게도 천둥 같은 상처가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의 한 사람은 수많은 어제들이 빚어 낸 결과입니다. 상대의 현재만 판단하지 않고 그가 걸어온 시간을 헤아릴 때 이해와 배려가 시작됩니다.

그래서 〈대추 한 알〉은 자연시가 아니라 인간학이며, 인생철학입니다.

사물을 깊이 보는 사람은 결국 사람도 깊이 보게 됩니다. 시인의 눈은 작은 대추 한 알에서 우주를 발견했고, 독자는 그 대추 한 알 속에서 자신의 삶을 발견합니다.

좋은 시는 많은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줄이 오래 남습니다. 장석주의 이 작품은 "결과만 보지 말고 과정을 보라."는 삶의 진실을 가장 압축된 언어로 보여 준 수작입니다.

작은 대추 한 알을 통해 거대한 시간과 생명의 비밀을 드러낸 시인의 통찰은 오래도록 우리 문학 속에서 빛날 것입니다.

그 한 알은 단순한 열매가 아니라, 인내가 익어 만든 생명의 결정체이기 때문입니다.

권오정 문화부장/

권오정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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