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노래] 책, 바다책, 다시 채석강

박상봉 사회부장 기자

등록 2026-01-20 10:37

책을 읽으면 머리카락 몇 올이 돋아나는 것 같아

넘겨도 넘겨도 다음 페이지가 나오지 않는다


최백호


책을 읽으면 머리카락 몇 올이 돋아나는 것 같아

아주 큰 무엇은 아니고 딱 그만큼만

아주 작은 그만큼만

그래도 옷에 묻은 흙을 털고

신발 끈을 조여매는 힘은 생기지

노래도 그래

먼 기적소리처럼

가슴 뛰던 젊은 날의 울림은 아냐

그냥 헌 모자 하나 덮어쓰고 바다가 보이는 언덕으로 가고 싶은 정도이지

책을 읽으며 노래를 들으며 아직은 눈물 흔적 지우고 살아

내가 그래

당신은 어때?


바다책, 다시 채석강


문인수


민박집 바람벽에 기대앉아 잠 오지 않는다

밤바다 파도 소리가 자꾸 등 떠밀기 때문인데

무너진 힘으로 이는 파도 소리는

넘겨도 넘겨도 다음 페이지가 나오지 않는다


아 너라는 冊


깜깜한 갈기의 이 무진장한 그리움

나무 한 권의 낭독


고영민


바람은 침을 발라 나무의 낱장을

한 장 한 장 넘기고 있다

언제쯤 나도 저러한 속독을 배울 수 있을까

한 나무의 배경으로 흔들리는 서녘이

한 권의 감동으로 오래도록 붉다

얼마나 읽고 또 읽었으면

저렇게 너덜너덜 떨어져나갈까

이 발밑의 낱장은 도대체 몇 페이지였던가

바람은 한 권의 책을 이제

눈감고도 외울 지경이다

또 章들이 우수수, 뜯겨져나간다

숨진 자의 영혼이

자신의 몸을 물끄러미 바라보듯

바람은 제 속으로 떨어지는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손바닥으로 받아들고

들여다보고 있다

낱장은 손때 묻은 바람 속을 날다가

끝내 땅바닥으로 떨어지고, 밟힌다

철심같이 앙상한 나무 한 그루가

인적 드문 언덕에 구부정히 서서

제본된 푸른 페이지를 모두 버리고

언 바람의 입으로 나무 한 권을

겨우내 천천히 낭독할 것이다  



류인서


온몸이 흰

미라 같은 책이 있다


당신의 손은 고고학자의 그것, 침착하게

얼굴에 눌러붙은 붕대를 벗겨내는 중이다


빛 아래

차갑게 떠오르는

군데군데 변색한 미라 특유의 얼굴빛과

어둠이 파먹은 이 목 구 비


정작 중요한 건

누구도 이 책의 진짜 얼굴을 모른다는 것이다

이 책은 누구에게나

붕대를 푸는 일만으로 끝나기 마련인

끝없는, 표지의 책이기 때문


썩지 않는다는 책의 심장은

발굴되지 않는다


시는 독자가 책과 만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독자가 책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또한 미학적인 아주 이상한 경험도 있습니다. 그것은 시인이 작품을 착상하고, 작품을 발견하거나 만들어 나가는 순간입니다. 이미 잘 알려져 있다시피, 라틴어로 '발견하다(descrubrir)'는 '만들다(inventar)'와 동의어입니다. 이 모든 것은 새로이 만들거나 발견하는 것은 기억하는 것이라는 플라톤의 가르침과 일치합니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배우는 것이 기억하는 것이라면, 알지 못하는 것은 잊어버리는 것을 배우는 것이라고 덧붙입니다. 모든 것이 이런 식입니다. 단지 우리가 보지 못할 뿐입니다.


나는 무언가를 쓸 때면, 그 무엇이 예전부터 이미 존재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그럼 일반적인 개념에서 출발하겠습니다. 나는 대략 처음과 끝을 알고 있고, 그런 다음 중간 부분들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그 부분을 새로이 만들어낸다는 느낌도 들지 않고, 그것들이 내 자유 의지에 종속된다는 느낌도 들지 않습니다. 이미 존재하지만 숨겨져 있던 것, 시인으로서의 내 임무는 바로 그것들을 발견하는 것입니다.(보르헤스)

박상봉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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