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는 익숙해서 괜찮은데 둘은 왜이렇게 힘드냐
시를 읽으면 그 사람 마음에 등불이 켜지고
그 등불로 인해 자신은 물론 주위가 환해진다
환절기
박상봉
손바닥을 펴면 새벽은
강물처럼 파랗게 떨고 있다
풀잎의 잠 속에서 걸어 나와
닫힌 문을 열고 바람을 만난다
지층의 깊디깊은 곳까지
뿌리 내린 바람은
내가 서 있는 위치에서
동쪽으로 가만히 뼈를 세우고
높은 지붕의 집을 짓는다
해진 옷자락 사이로 울고 있는
투명한 아픔을 닦으며
마지막 햇빛 하나까지 잃으려할 때
우리에겐 잠들 수 있는 그늘이 필요한 것이다
어디서 시냇물 소리가
얕게 얕게 잠드는 바람을 흔들어 놓고
조금씩 파도치는 새벽을 향해
눈을 뜬다
영화《환절기》포스터
아시다시피 환절기(換節期)는 계절이 바뀌는 시기, 혹은 철 이 바뀌는 때를 뜻한다.
계절의 성격이 달라지는 시기이므로 지금이 환절기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겠다. 일기예보는 벌써 4월 중순의 따뜻한 봄 날씨가 찾아오겠다고 하니, 요즘 날씨는 겨울에서 봄으로 가는 환절기가 엘리뇨 현상으로 빨리 오는 것 같다.
환절기에는 낮과 밤의 기온 차가 심하다.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갈 때는 낮에는 따스하다가도 밤에는 손이 얼 정도로 춥기도 하다. 어떤 날은 가벼운 복장으로 나갔다가 다음날 바로 두꺼운 코트가 필요해질 정도로 하루이틀 사이에 기온이 큰 폭으로 변하기도 한다.
낮과 밤의 온도 차이가 커서 면역력이 떨어지는 시기이다. 이 때문에 단순히 추운 날이 연속되는 한겨울 날씨보다 따스한 날에 오히려 감기에 걸리기 쉬울 수도 있어 복장에 세심한 신경을 써야 한다.
자작시 「환절기」는 내 시집에 포함되지 않은 작품이다.
영화《환절기》메인 포스터
영화 《환절기》는 제21회 부산국제영화제 뉴커런츠 섹션에 초청되어 KNN 관객상을 수상하며 개봉 전부터 평단과 관객들에게 지지를 받았다.
2018년 이맘때 개봉된 후 지속적인 입소문으로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더니 그해 4월 아웃샤인필름페스티벌(OUTshine Film Festival)에서 심사위원상의 영예를 안았다. 미국 아웃샤인필름페스티벌은 1998년 마이애미의 성소수자 영화제로 시작된 이후 대중적인 인기에 힘입어 마이애미뿐 아니라 포트 로더데일에서까지 각각 4월과 10월에 개최되는 미국 플로리다 남부의 대표적인 문화 예술 축제다.
영화 《환절기》는 고등학교 때부터 사랑을 나누던 동성친구 용준(이원근)과 수현(지윤호)이 제대 후 여행에서 교통사고로 수현이 식물인간이 되고, 친구의 어머니 미경(배종옥)이 둘 사이의 관계를 눈치채면서 일어나는 갈등과 미묘한 심리변화를 정교하게 다룬 퀴어영화다.
그동안의 대다수 퀴어 영화는 당사자들의 관계와 심리를 주로 묘사했다.《환절기》는 이들을 바라보는 엄마의 시각으로 새롭게 풀어내 신선함을 준다.
마음의 계절이 바뀌는 순간, 서로의 마음을 두드린 세 사람의 가슴 아프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다룬 영화 《환절기》는 큰 사건으로 밀어붙이지 않는다. 대신 계절이 바뀔 때 몸이 먼저 알아차리는 서늘함처럼, 상실이 사람 안으로 스며드는 시간을 따라간다. 이 영화에서 이야기는 앞으로 나아가기보다, 자꾸 멈춰 서서 날씨를 살핀다. 마치 아직 오지 않은 봄을 미리 기대하지 않으려는 것처럼.
이 영화는 아들을 잃은 어머니와 그 상실의 여파 속에서 흔들리는 가족에게 ‘왜’보다는 ‘어떻게 견디는가’를 묻는다. 견딘다는 말조차 조심스러워서, 영화는 끝내 위로나 해답을 건네지 않는다. 대신 인물들의 얼굴과 침묵, 그리고 서로를 비켜 가는 시선만을 남긴다.
배종옥
배종옥의 연기는 말이 거의 없다. 그 적막이야말로 이 영화의 핵심이다. 그녀의 얼굴에는 감정을 설명하려는 표정이 없다. 다만 하루를 버텨내는 사람의 체온만이 남아 있다. 환절기라는 말이 계절의 변화이기 이전에 사람이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넘어가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시간임을 이 영화는 몸으로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 인물들은 서로를 붙잡지 않는다. 어설픈 위로도, 명확한 책임의 언어도 피한다. 붙잡으려는 순간조차 조심스럽다. 대신 계절을 건너는 중인 사람처럼, 한 발씩 늦게 걷는다. 그래서 관계는 이어지기보다, 같은 공간에 머무는 상태로 남는다.
지윤호가 연기한 수현과 이원근이 연기한 용준의 존재는 이 영화의 숨은 균열이다. 그들은 새로운 계절을 예고하는 인물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또 다른 불안을 품고 있다. 젊음은 여기서 희망이 아니라, 아직 상실을 다 겪지 않은 상태로 나타난다. 그 역시 언젠가는 같은 계절을 통과해야 할 사람이다.
영화의 화면은 지나치게 아름답지 않다. 햇빛도, 바람도, 풍경도 과장되지 않는다. 그 절제 덕분에 관객은 인물의 감정을 대신 느끼려 하지 않고, 그 곁에 조용히 앉아 있게 된다. 이 영화는 관객을 울리려 하지 않는다. 울음이 오기 직전의 상태, 목 안쪽이 서늘해지는 그 지점에서 멈춘다.
그래서 《환절기》는 슬픈 영화라기보다 차가운 영화다. 하지만 그 차가움은 마치 해진 옷자락 사이로 바람이 들어오는 순간처럼, 아픔이 투명하게 느껴질 뿐이다. 영화는 말한다. 어떤 상실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야 할 계절이라고.
시가 그렇듯, 이 영화도 질문을 남긴다.
우리는 언제 잠들 수 있을까.
그리고 잠들 수 있는 그늘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
영화 《환절기》는 그 질문을 끝까지 붙잡은 채, 조용히 다음 계절로 넘어가지 않는다. 아직은 바람이 차가운 채로 봄의 문지방에 머뭇거린다.
영화《환절기》의 한 장면
살아가다가 보면 깊은 절망에 빠질 때가 있다. 그럴 때 가슴에 떠오르는 주기도문처럼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주는 그런 시가 있다. 때로는 시 한 편의 감동이 한 사람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기도 한다.
우리 사는 세상은 점점 아름다운 사랑도, 아름다운 이별도 없어져 가는 삭막한 시대, 메말라 가는 절망의 시대로 치닫고 있다.
사회가 갈수록 어둡고 병들어 가는 것 같아 안타깝다. 요즘 사람들은 종잡을 수 없는 날씨처럼 변덕이 죽끓듯하고 너무 이기적이고 자신을 돌보는 일에만 적극적이다. 이럴 때 시가 꼭 필요하며 시는 정신의 건강을 지켜준다.
요즘 같은 어려운 시기에 절망의 바다에 빠져 있는 분이 있다면 시를 읽어보기 바란다. 시를 읽으면 상처 난 몸과 마음이 따뜻해지고, 슬픔에서 기쁨을, 좌절에서 용기를, 절망에서 희망을 찾게 될 것이다.
‘비를 맞으며 걷는 사람에겐 우산보다 함께 걸어줄 누군가가 필요한 거’라는 이정하 시인의 어느 시 구절처럼 시 한줄이 촉촉한 감성으로 마음을 적시는 길동무가 되어줄 것이다.

박상봉 시인의 「낮달」 박정애 낭송
박상봉 사회부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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