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 산책(19)] 봉선화,가람 이병기

권오정 문화부장/ 기자

등록 2026-07-28 07:20



봉선화,가람 이병기

비 오자 장독 간에 봉선화 반만 벌어
해마다 피는 꽃을 나만 두고 볼 것인가
세세한 사연을 적어 누님께로 보내자

누님이 편지 보며 하마 울까 웃으실까
눈앞에 삼삼이는 고향 집을 그리시고
손톱에 꽃물 들이던 그 날 생각하시리

양지에 마주 앉아 실로 찬찬 매어주던
하얀 손 가락 가락이 연붉은 그 손톱을
지금은 꿈속에 보듯 힘줄만이 서누나

/가람 이병기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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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 장독대 곁에 피어난 봉선화를 바라보면 마음 한구석이 먼저 젖는다. 꽃이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그 꽃 속에 어린 시절과 부모님, 그리고 형제자매의 웃음소리가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가람 이병기의 시조 「봉선화」는 그런 추억을 절절하게 노래한다.

"누님이 편지 보며 하마 울까 웃으실까 / 눈앞에 삼삼이는 고향 집을 그리시고 / 손톱에 꽃물 들이던 그 날 생각하시리."

봉선화 꽃물은 한여름의 놀이였다. 어머니는 꽃과 잎을 찧어 손톱 위에 올려놓고 헝겊이나 실로 정성껏 감아 주셨다. 하룻밤을 지나 붉게 물든 손톱을 바라보며 기뻐하던 아이들의 얼굴에는 근심도 걱정도 없었다. 그 작은 꽃물에는 가족의 사랑과 따뜻한 정이 함께 물들어 있었다.


세월은 누구도 비껴 가지 않는다. 부모님은 별이 되고, 형제들도 하나둘 인생의 길목을 떠난다. 어느새 곱던 손은 힘줄이 도드라지고, 검은 머리는 백발이 된다. 가람은 그 모습을 "지금은 꿈속에 보듯 힘줄만이 서누나"라고 담담하게 읊었다. 짧은 한 구절이지만 읽는 이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요즘 치매를 앓는 어르신들에게는 신기한 공통점이 있다고 한다. 최근의 일은 잊어도 어린 시절 고향과 친정, 부모님 이야기는 또렷이 기억하는 경우가 많다. 평생의 기억 가운데 가장 따뜻하고 행복했던 시간이 마음 깊은 곳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치매를 앓는 한 누님이 친정 이야기를 듣자 귀를 쫑긋 세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부모 형제는 모두 세상을 떠났지만, 친정이라는 두 글자는 여전히 마음속 고향으로 살아 있었던 것이다. 봉선화 꽃물을 들이던 그 여름날은 병마도 지우지 못한 추억이었다.

오늘도 장독대 곁 어디선가 봉선화가 피어날 것이다. 꽃은 해마다 피고 지지만 사람의 삶은 한 번뿐이다. 살아 있는 동안 형제의 손을 한 번 더 잡고, 부모님을 추억하며, 고향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야말로 가장 귀한 효도이자 사랑이다.

봉선화 꽃물은 오래가지 않는다. 그러나 그 꽃물이 물들인 가족의 정과 고향의 추억은 평생 가슴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그래서 봉선화는 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어린 시절이고, 친정이며, 그리움의 이름이다.

권오정 문화부장/

권오정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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