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이념 지식
장희빈과 관련해 TV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자주 등장하는 조선
제29대 왕 숙종은 22세 되던 해 초겨울에 두창(천연두)에 걸렸다 재위 9년째의 일이다 아들 사랑이 지극했던 그의 모후
(母后)는 자신에게 병을 옮겨달라고 하늘에 빌었다.날이 추웠건만 기도에 앞서 목욕재계하는 일을 빠뜨리지 않았다.그 정성이 하늘에 닿았음인지 숙종은 한 달 가까이 앓다가 나았으나 대신 대비가 병들어 영영 일어나지 못했다.
흔히 옛사람들은 거의 목욕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들 하지만 이는 사실 근대가 부여한 허상(虛像)이다.1년에 두 차례
설과 추석에만 목욕한다는 농담 반 진담 반의 이야기는 되시화가 진전되고 동네 우물이 사라졌음에도 주택 구조와 수도
설비가 그를 충분히 보완하지 못했던 시절의 이야기일 뿐이다
2910년대에 한국을 찾았던 한 외국인은 한국인들이 밖에 나갔다 와서는 목욕부터 한다고 증언한 바 있다.물론 여름철의
이야기다.요일제가 없던 조선 시대에는 관리들이 닷새에 하루씩
쉬었는데 쉬는 날을 휴목일(休沐日)이라고 했다.
휴식하면서 목욕하는 날 이라는 뜻이다.다만 옛사람들이 현대인들처럼 위생과 건강을 생각해서 목욕한 것은 아니다.그들에게 목욕은 대체로 종교의례의 일부였다.부정(不淨)한 몸으로 신 앞에 나서서는 안 됬으니 기도하기 전에는 먼저 몸을 깨끗이 하고 잡생각을 지워야 했다.
그래서 목욕이라는 단어 뒤에는 늘 깨끗이 하는 계율 이라는 뜻의 재계(齎戒)라는 단어가 따라다녔다.
옛날에는 사람이 이해하지 못 하는 일이 너무 많았고 그런 일들은 모두가 신의 영역 이거나 귀신의 소관 에 속하는 것으로
취급됐다.그런 만큼 신을 찾아야 할 일도 많았다.가족이 아플때 남편이 과거 시험 보러 갈 때 송사(訟事)에 휘말렸을 때 메뚜기 떼가 농사를 망쳐 놓을 때 심지어는 다른 사람을 저주할때조차도 먼저 목욕을 해야 했다 보통사람의 일상에서는
이런 경우가 한 해에도 열 번은 족히 넘었을 것이다.인간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합리적 이성으로 해석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게 된 것은 16세기 과학혁명 이후의 일이다 이후 사람ㄷ ㄹ은 자신과 타인ㅇ 행위를 그리고 자연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이성으로 재해석했다.신과 관련되어 있던 행위들이 인간 자신의 직접적 필요에 따른 행위들로 급속히 재구성했고 계율 대신에 지식이 사람들의 의식과 행동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현대인들은 무엇을 얼마나 먹을 것인지.언제 자고 일어날 것인지 언제 이사를 할 것인지 어떤 자동차를 살 것인지 말 것인지 등 일상의 크고 작은 일들을 의학.법학.경제학.물리학.
공학 등의 지식에 의존해 결정한다.지식이 새로운 신이 된 셈이다.지식의 영역이 확장되면서 한동안 지식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체계화한 이념 의 비중이 커졌다 이교도에게 향해던
화살이 다른 이념을 가진 사람들에게로 돌려졌다.19세기 말
이래 전 세계에서 이념 대결의 와중에 죽은 사람의 수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희생된 사람의 수보다 적지 않을 것이다.그런데
이념은 개별 사건과 사물에 대한 지식들을 묶어줬지만 자식이
세분되고 깊어지자 오히려 지식의 자유로운 발전을 가로막게
됐다.이른바 탈(脫)이념화는 이념이 지식 발전의 질곡이 된 현상에 대한 자각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신앙심이나 이념 지식 외에 사람의 행위를 지배하는 또 다른 요인으로 기분 이 있다 신앙심이나 이념.지식이 서로 어울려
습관적 행위를 만들어 내는 것이라면 기분은 보통 순간적으로
나마 일상을 깨뜨리는 구실을 하며.가끔은 신념과 이념에 어긋
나는 행동을 유발하기도 한다.어느 날 갑자기 출근하기 싫어지고 공연히 다른 사람에게 짜증이 나며 느닷없이 별 쓸모도 없는 물건이 사고 싶어지는 이유를 이념과 지식으로 설명할 수는 없을 터이다.
기분은 건강 상태나 사회적 관계의 변화에 좌우되기도 하지만
날씨와 같은 자연조건에 영향을 받기도 한다.1987년 6월 10일
에 비가 쏟아졌다면 6.10 민주화운동 이라는 이름이 달라졌을
수도 있다 근대 사회는 기분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죄악시했지
만 최근에는 당위적 지식으로 포위된 일상을 순간이나마 변화
시키는 요소로 취급하는 긍정적 태도가 확산하고 있다 이제 목욕을 종교의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먹고 자고 일하고 쉬는 일상의 영역에서 이념이 차지하는 비중도 무시할 수 있을 만큼 미미해졌다.이념보다는 지식과 기분이 차지하는 자리가 훨씬 넓다.
그런데도 근래 한국 사회에서는 이념 문제가 새삼 심각하게 불거지고 있다 경제적 손실을 감수하면서까지 이념 외교 를 실행하거나 이념이 가장 중요하다.며 국민을 이념으로 분열시키는 정치 담론이 횡행한다.정작 자기 이념이 무엇인지 생각도 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에게 어떤 이념이든 선택하고 고백하라고 강요하는 형국이다.그러나 이념 과잉은 지식 부족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제주 4.3사건이나 광주 5.18 민주화운동이
좌익 폭도들의 난동 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특정 이념 때문이 아니라 진상을 직접 알아보는 것조차 귀찮아하는 지적 나태와
지적 무능의 소산이다.오늘날 이념이라는 말은 주로 이 지적 나태와 무능을 합리화하는 도구로 이용된다.사람들이 정확히 판단하는 데 필요한 것은 정보와 지식이지 이념이 아니다.
최용대 발행인/ 주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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