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평론] 최용대의 水墨山川圖 (수묵산천도) 감상평

이원희 기자

등록 2025-08-08 18:18

한시와 그림, 낭송 세박자가 함께 어우러진 콜라보의 감성 해석

수묵산천도 / 글  최용대



水墨山川圖 (수묵산천도)


  최용대 (崔 鎔 大)


筆橫江煙雨深 (일필횡강연우심)

단 한 획 붓이 강을 가로지르니, 안개비가 짙어지고


雙峰如夢靜中吟 (쌍봉여몽정중음)

두 봉우리는 꿈처럼 고요한 가운데 시를 읊조리네  


誰知畫外心頭月 (수지화외심두월)

누가 알랴, 이 그림 밖 마음속에 뜬 달빛을


幽思滿紙不成音 (유사만지불성음)

그리움 가득 찼건만, 종이 위에 소리가 되지 못하네


지성기 주역 ,철학박사, 강사


【第1章】수묵산천도 앞에서


나는 오늘 한 점의 그림 앞에 앉았다.

먹 하나로 그려진 산과 물,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중심에 놓인 여백.


처음엔 그저 눈으로 보았다.

왼편 아래에는 낮은 언덕이 있고, 거기 나무 몇 그루가 심어져 있다.

그 아래로는 잔잔한 물길이 흘러간다.

오른쪽 위에는 안개처럼 스며든 산봉우리가 하나,

겸손하게 고개를 내밀고 있다.


그런데 이상했다.

내 눈은 자꾸만,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가운데를 향했다.

화면의 정중앙, 흰 종이만 남은 그 자리에

나는 어쩐지 가장 많은 것이 담겨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화가는 왜 거기를 비워두었을까.

혹은, 정말로 비워두기만 했을까.


나는 그 여백 안에서

바람 소리를 들었고,

흘러가는 시간을 느꼈으며,

말없이 서 있는 나 자신을 보았다.


그림이 나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그림이 질문하는 것 같았다.

“너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수묵화는 말이 없다.

그러나 그 침묵은, 때로 어떤 언어보다 깊다.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이 그림이 그리고 있는 것은 산과 물이 아니라,

내 마음의 형상이라는 것을.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비워진 곳에서 오히려 충만함이 태어난다.

그것이 이 그림이 가르쳐준 첫 번째 진리였다.


나는 한참 동안 그림 앞에 앉아 있었다.

그림을 보는 게 아니라,

그림 속 보이지 않는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시간이었다.


【第2章】달은 그리지 않았지만 떠 있었다


나는 그림 앞에 오래 머물렀다.

그러다 옆에 놓인 한 편의 시를 보았다.

제목은 「水墨山川圖」.

이 시를 지은 이는 내가 아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나는 이 시를 마치 나의 심정을 대변하듯 받아들였다.


一筆橫江煙雨深


이 첫 줄에서 시인은 그림의 시작을 다시 불러낸다.

화가가 쓱 그은 붓 하나가

시인의 눈에는 강을 만들고,

그 위에 안개비를 내려 앉힌다.

나는 여기서 기(氣)를 느꼈다.

주역에서 말하는 형이하의 세계,

먹의 흐름 속에 생동하는 기운이다.


雙峰如夢靜中吟


이어서 등장하는 두 봉우리.

시인은 그것을 ‘꿈결’ 같다고 했다.

그 정적인 풍경 안에서 시를 읊는다니,

나는 여기에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감응을 느꼈다.

시인의 마음이 산과 하나가 되었기에,

산이 시를 읊는 것인지, 시인이 산을 읊는 것인지 경계가 흐려졌다.


誰知畫外心頭月


이 구절에서 나는 멈췄다.

그림에는 달이 없다.

하지만 시인은 말한다.

그림 밖에, 자신의 마음속에 달이 떠 있다고.

나는 이 대목을 ‘무중생유(無中生有)’의 철학으로 읽었다.

그리지 않았으되 가장 뚜렷하게 존재하는 것.

말하지 않았으되 가장 깊이 울리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예술이 아닐까.


幽思滿紙不成音


이 마지막 구절에서

나는 시인이 말하고자 했던 모든 것을 느꼈다.

소리로 나오지 못한 깊은 사유,

말로 다하지 못한 여운.

그것은 시의 결핍이 아니라,

시가 도달한 궁극의 경지다.


나는 이 시를 통해

그림 속에서는 볼 수 없었던 또 하나의 산수를 보았다.

눈으로 보던 수묵은, 이제 마음으로 느끼는 수묵이 되었고,

그림을 그리지 않은 시인은,

그림 밖 세계를 보여주는 또 다른 화가가 되었다.


시인은 달을 그리지 않았고,

화가도 달을 그리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분명히

그림과 시를 함께 바라보는 가운데

내 마음속에 떠 있는 달을 보았다.


그 달빛은

나의 사유 위에 조용히 내려앉아 있었다.


【第3章】허(虛)의 중심에서 도(道)를 보다


나는 그림을 보았고,

그 옆에 놓인 시를 읽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 두 세계를 관통하는 제3의 세계로 들어간다.

이 세계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가장 깊고 넓다.

나는 그것을 형이상학의 차원,

혹은 주역이 말하는 도(道)의 차원이라 부른다.


그림은 형태를 그린 것이 아니다.

시 또한 사물을 묘사한 것이 아니었다.

이 둘은 모두, ‘없는 것을 통해 있는 것을 드러내려는 시도’였다.

그림은 여백을 통해 실재를 보여주었고,

시는 말하지 않음으로써 감정을 들려주었다.

이것은 곧 주역에서 말하는 허중지실(虛中之實)의 원리이다.


『주역』에는 “태극이 움직여 두 기를 낳고(太極動而生兩儀)”라는 말이 있다.

태극은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중심이다.

그런데 그것이 움직이면 음양이 생기고,

음양이 사상(四象)을 낳고, 만물이 생겨난다.

그림의 여백, 시의 침묵 —

이 모두는 태극의 상태이며,

그 안에서 형(形)이 생겨나고 감(感)이 움직이는 것이다.


나는 이 수묵산천도를 ‘건괘’와 ‘곤괘’의 상호작용으로 본다.


산은 건(乾), 하늘의 형상이다.


물과 땅은 곤(坤), 수용과 포용의 형상이다.


그림은 건괘의 창조에서 시작하여 곤괘의 수용으로 내려오며,


시는 다시 그 두 괘를 꿰뚫는 중(中)으로 돌아가 심월(心月)이라는 상징을 드러낸다.


이 ‘심월’은 中孚괘의 핵심이다.

澤上有風 — 못 위에 바람이 이는 형상.

겉으로 보이지 않지만, 물 아래의 마음은 감응하고 있다.

신뢰(信), 울림(感), 그리고 마음의 여운.

그것이 바로 이 그림과 시의 본질이며,

나아가 주역 철학의 핵심이기도 하다.


나는 이 모든 체험을 통해, 하나의 결론에 이르렀다.

보이지 않음으로써 더욱 선명해지는 세계가 있다.

그림은 비움으로써 채웠고,

시는 침묵으로써 노래했으며,

철학은 그 둘의 중간에서 의미를 낳았다.


그것은 단지 미술이나 문학의 일이 아니다.

삶 또한 마찬가지다.

가득 채우기보다 한 줄 비워 두는 용기,

소리치기보다 조용히 머무는 지혜,

보이지 않는 것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능력.


그 모든 것이, 이 수묵산천과 한 편의 시가

내게 남긴 가르침이었다.


이 시를 낭송한 전미녀님은 며칠전 부군께서 유명을 달리하셨는데, 목소리가 짜랑한걸 들으니 안심이 된다. 

한시를 낭송하는 일이란 결코 쉽지 않다. 시에는 전통과 한국 고유의 정서가 서려 있기 때문에 목소리로 해석해 내려면 대단한 내공과 교감이 필요로하다 전미녀 낭송가 또한 깊은 내공으로 수묵산천도의 글, 그림, 낭송, 이 세박자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리고 그림과 시를 감상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하다.




지성기 道菴 池成基 / 주역가, 철학박사, 강사


성균관 전학 성균관유도회 충북 본부 상임위원

제천향교 장의 성균관유도회 제천지부 총무부장 

한국한시협회 제천지부 사무국장 

강원대학교 철학박사

성균관 한림원 문집번역 연구과정 재학

동양경전(周易)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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