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언제나 옳은 진리는 없다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본 장면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묻는다. 세종대왕이 누구냐. 그러자 아들이 답한다. 한석규라고. 놀란 아버지는 다시 묻는다. 그럼 고려 왕건은 누구고, 발해 대조영은 누구냐. 아들의 답은? 최수종! 이렇게 대답하고는 아들 역시 혼란에 빠진다. 어떻게 최수종이 왕건일 수도 있고, 대조영일 수도 있는 거지? 물론 드라마니까 과장해서 보여주는 면이 없지 않다. 하지만 요즘 청소년들의 역사 지식이 이와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는 게 내 생각이다. 드라마 때문에 이산은 알아도 그가 바로 정조인지는 모르고, 정기준이 이끄는 밀본을 그냥 사실로 믿어버린다.
나의 서재에는 조카아이들이 드나들며 공부한다. 이들은 동서양의 고전을 읽으면서 그 또래로서는 제법 성숙한 고민을 하고, 자기 생각을 글로도 곧잘 표현한다. 그런데 이들에게 공통점이 있으니, 바로 역사에 대한 무지다. 역사인식이나 뭐 그런 걸 말하는 게 아니다. 기초적인 상식들, 예컨대 훈민정음이 언제 반포되었는지, 3·1운동이 언제 일어났는지, 세종이나 정조가 몇 세기의 사람인지, 뭐 그런 단순한 팩트에 대해서조차 백지다. 그러니 작게는 식민지 지배나 한국전쟁, 1980년 광주 등의 경험, 더 크게는 굵직굵직한 세계사적 사건들이 지금 우리의 현재 삶에 어떤 영향을 주고 나의 존재양식과 어떤 식으로 연관되어 있는지를 이해하기란 요원한 일이다. 역사를 ‘암기과목’으로 생각하는 것도 문제지만, 그나마 역사가 대학입시 과목에 선택되지 않는 한 역사에 대해서 가르치려고도 배우려고도 하지 않는 현실은 정말 심각한 문제다.
“<춘추>는 시비를 변별해놓은 것이기 때문에 인사를 처리하는 데 대한 서술이 뛰어납니다. …<춘추>는 정의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지러운 세상을 수습하여 올바른 세상으로 되돌려 놓는 데는 <춘추>보다 더 좋은 책이 없습니다. …<춘추>를 알지 못하면 늘 있는 일을 처리할 때 선례를 고집할 뿐 적절하게 조처할 줄 모르고, 또 변고를 당하여서는 거기에 통하는 방법을 알지 못합니다.”(사마천, <사기>)
동아시아 역사서의 대명사인 <춘추>를 언급하면서 한(漢)나라의 역사가 사마천은 자신의 역사인식을 슬쩍 끼워 넣었다. 사마천에 따르면,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변화를 통찰하게 할 뿐만 아니라, 인간이 현실에서 어떻게 행동하고 살아가야 하는가를 보여준다. 현실 사회에서는 착하게 살았는데도 무고하게 죽임을 당하는가 하면, 무도한 인간들이 부귀영화를 누리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탄식이 나온다. 세상이 뭐 이렇게 거지같아! 세상사를 주재하는 하늘이 있다면 하늘이 원망스러울 정도다. 사마천이 바로 그런 삶을 살았다. 왕에게 진언했다가 참형을 당했으니, 어찌 하늘이 원망스럽지 않았겠는가. 억울하고 억울했을 터.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막 살 수는 없지 않은가. 세상이 무도하다면, 인과응보를 보장해주는 법칙도 없다면, 나약한 인간은 뭘 기준으로 삼아 살아야 할까. 사마천의 답은 역사였다.
역사는 알려준다. 세상을 지배하는 하나의 원리, 즉 누구에게나, 언제나 옳은 보편진리란 없다는 사실을. 사마천이 그려낸 역사적 인물들은 저마다 자신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살아갔다. 역사는 이들을 통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반복적으로 던진다. 현실은 항상 다양한 조건들과 변수들로 변화한다. 따라서 유한하고 한정적인 경험만을 가진 우리로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다. 그럴 때 역사는 우리에게 변화하는 시공간과 인간사를 새롭게 보게 만드는 안경이, 또 적합한 행위를 할 수 있는 잣대가 되어준다.
인간의 삶에 답을 주는 건 또 다른 시공간을 살았던 또 다른 인간들의 삶이다. 그들이 없다면 현재의 우리도 없다.
역사 속의 무수한 사건들과 인물들의 사상과 행위는 현재 우리의 삶에까지 파동치고, 역사를 통해 우리는 현재의 인과를 보는 동시에, 현재를 다르게 펼칠 수 있는 가능성을 본다. 과거와 현재의 변화를 꿰뚫어봄으로써 우리는 지금의 시공간과 현실에서 좀 더 자유로워질 수 있는 힘을 확보할 수 있다. 이게 바로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다.
최용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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