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8을 맞이하여 고우들과 함께 나누고자 원단 안부와 함께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벌어진 ‘도끼만행 사건’은 남북 분단 체제가 품은 폭력의 민낯을 전 세계에 드러냈다. 냉전의 한복판에서, 유엔군 체제와 북한 정권, 그리고 남북의 정치적 대치 속에 터져 나온 비극이었다. 영어와 무도에 능통해야만 차출되던 특수부대, JSA에서 근무했던 최종림 작가는 그 살얼음판의 긴장을 몸으로 겪으며 제4초소에서 북한군과 맞대며 보내던 날들, 그리고 미루나무에 새겨 넣은 이름조차 사라져야 했던 8·18의 참극은 군사적 사건이자 분단 정치가 낳은 상징적 상흔이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북한은 도발을 이어가고, 남북은 여전히 신뢰 없는 대치 속에서 정치적 셈법에 매여 있다. 최종림 작가의 "제4초소와 미루나무"는 전쟁은 멈췄으나 평화는 시작되지 않았다는 사실과 함께 전쟁의 불안, 정치적 현실을 수필로 증언하고 있다.
오늘의 한반도는 북·중·러의 결속과 미·중 갈등이라는 새로운 냉전의 틀 안에 놓여 있다. 이 불안정한 지정학 속에서 8·18의 기억은 우리가 외면할 수 없는 현재이자 미래다. 그렇기에 기억을 망각한 평화 담론은 공허하며, 현실을 직시하지 않는 안보 인식은 더 크고 참담한 비극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원희기자-
최종림 작가
제 4 초소와 미루나무
나는 비목의 처연한 노래 말처럼, 초연이 쓸고 간 흔적이 아직 역력한 그런 곳에서 군 생활을 했다. 봄이면 송악산 남쪽 버려진 벌판, 외로운 산목련이 빈약하게 작은 꽃을 피워내는 곳이었다.
나는 제 4초소라 불리는 곳에서 한번에 4시간 동안 초병 근무를 했다. 그것은 송악산 뒤로부터 나타나 들판 외길을 가로 질러 오는 북한군 차량이 초소 60미터 앞 사천강 위에 놓인 다리(no return bridge)를 건너 초소 앞을 지나 공동으로 사용하는 우리 부대(JSA)로 들어가는 것을 관찰하고, 특이 상항을 기록, 보고하는 일이었다.
이곳은 완전 북한 땅에 치우쳐 들어가 지어진 초소로 저들이 나쁜 마음만 먹는다면 본부의 구조 작전 전에 북한으로 보쌈 당할 최적지였다. 그래서 부대에서는 반마장 뒤 언덕 위에 관측소를 따로 두어 우리의 위험 상황을 항상 주시하고 있었다.
나는 처음에는 마냥 힘들고 불안했으나 이내 두려움 같은 건 사라졌다. 그러나 위중한 근무의 긴장감에서 오는 견딜 수 없는 스트레스와 지루함이 나를 옥죄었다. 그 4시간은 참 긴 시간이었다.
가끔씩 초소 앞을 지나가는 북한군 차량에서는 나에게 욕설을 퍼붓고 지나가는 놈, 핸들로 겁을 주는 놈 등 참 험하고 짖궃던 놈들도 많았다. 가끔 약도 올랐지만 만약 내가 잘못 과잉 대응하다 일이 생기면 우리 부대 주위에 있는 2~3개 사단에 비상이 걸린다. 나 한사람 잘못 대응으로 수많은 젊은 동지들이 외출, 외박이 금지되게 된다. 그래서 다른 큰 부대가 비상이 걸릴 때마다 "또 JSA 그 새끼들 때문이야." 하는 욕도 먹었다.
그 시절은 남북공동협상이 시작되어 여러 협상단이 서울과 평양에서 우리 부대에 와 회의를 하곤 했다. 서울에서 오는 협상단은 몇 대의 고속버스로 왔고, 그 버스에는 지금 생각해도 깜짝 놀랄 정도의 짧은 미니스커트의 여승무원이 같이 왔었다. 나는 주위에 흩어져 있는 북한 군인들에게 "동무, 일루와. 내레 남쪽 미인 소개시켜 줄게." 하며 짖궃게 아가씨들 옆으로 끌고와 사진을 찍게 했다. 그러면 그들은 극구 사양하며 얼굴이 빨개지다가 기어이는 못 이긴 척 사진을 찍곤 했다.
이렇게 회담장 부근에서 사귄 북한 친구들이 생기자 내가 근무하는 날에는 지나가던 차량에서 아는 척 안부인사도 하고 가끔은 백두산 담배를 던져주는 것이었다.
그래도 나의 군 시간은 너무나 천천히 지나갔고, 몹시 지루했다. 봄이 깊어진 제 4초소 앞길 건너 버려진 들판에서는 군데군데 핀 산목련 주위로 에둘러 싼 산찔레꽃 무덤들 향기는 가히 뇌살적이었다.
이제 스물 두 해 넘기며 살아온, 세계를 향해 달리고 싶은 나를 전흔 가득한 이곳에 속절없이 두어야 함도 또한 나를 미치게 하는 것이었다.
찔레꽃 무덤 주위에 흩어져 흙더미 밖으로 군데군데 내밀고 있는 하얀 뼈들은 나만큼, 아니 나보다 어린 학도병이었을 지도 모를, 피끓던 젊은이였을 것이다. 어쩌면 예쁜 새각시를 신혼 방 안에 두고 온 애끓던 새신랑이었을 지도 모른다.
생전 모르고 살았던 자본주의를, 언감생심 공산주의를 남북이 서구의 것을 가져다 그것이 무슨 살판날 좋은 것인 양...
그것으로 저 흙속의 슬픈 사연처럼 온 산야를 원한으로 붉게 물들이며 죽도록 서로 싸우게 누가 만들었나.
나는 답답하고 답답했다. 더운 여름이 오기 시작하자 비포장 비좁은 신작로 건너편 몇그루 줄지어 서 있는 미루나무 중 한 나무에 나도 모르게 내 이름을 새기기 시작했다. 너무 늙어버린 듯 그 나무 껍질은 생각보다 단단했다. 내 이름 '최종림'을 한번에 다 새길 수가 없었다.
나는 근무 중 잠시 쉴 짬이 나면 그리로 가서 하루는 'ㅊ' 그 다음 번은 'ㅗ' 그 다음에는 'ㅣ' 식으로 조금씩 새겨 나가며 서너달 남짓 지나 내 이름 석자를 새로로 다 새겨넣을 수 있었다.
'이제 조금 있으면 제대할 것이고 그땐 나는 여기 없겠지만 송악산 아래 초연이 쓸고 간 저 허망한 들판에 서 있을 미루나무에는 내 이름이 남아있겠지.'
그리고 나는 그곳을 떠나왔다.
그리고 얼마 후 8.18 도끼만행 사건이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몇 달 동안 내 이름 최종림을 새겼던 그 미루나무도 잘려나갔다. 그 미루나무 때문에 정말 다시 전쟁까지 날 뻔했다. 저들의 만행으로 내 동지들이 그 자리에서 젊은 피를 뿌리며 억하게 사라져 갔다. 그리고 그 처참한 현장에서 살아남았던 몇 동지들은 깊은 트라우마로 여직 고통 속에서 평생을 보내고 있다. 나는 이를 원통히 한한다.
아주 오래.
나는 이제 그 여름, 그 외롭던 젊은 나에게 정다운 그늘이 되어 주던 미루나무가 잘려나가고, 그 나무에 새긴 내이름이 사라진 것도 기억에서 내보내고 싶다.
이원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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