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에서 출생, 인천에서 성장했다. 미술을 하고 싶었으나 부모님 반대로 국문학을 선택했다. 문학보다는 사회과학 동아리에서 대부분 시간을 보냈다. 졸업 후, 조그마한 잡지사에서 기자 생활을 하다가 결혼하면서 글쓰기와 결별했다. 새천년이 열리던 2000년 1월, 남편 직장을 따라 시드니로 이주했다. 이즈음 모국어에 대한 집착 증상이 나타났고, 문학 언저리를 다시 어슬렁거렸다. 2009년, 2014년 두 차례 재외동포문학상에 입상하면서 수필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다. 몇 년 뒤 『시드니에 바람을 걸다』와 5인 공저 『바다 건너 당신』을 출간했다. 2021년 동주해외신인상을 받으며 시인이 되었고, 2025년 시산맥시문학상을 받았다. DSA(Disability Services Australia)에서 12년째 장애인들과 함께 일하고 있다. 문학동인 캥거루와 수필U시간 동인으로 활동 중이다. 『문학과 시드니』 주간, 계간 『웹진시산맥』 편집위원을 맡고 있다.
유금란 작가
돈 콜 미 베이비
회사 옆 카페에서 모닝커피를 주문하는데 나를 쳐다보는 바리스타의 눈빛이 남다르다. 뭐지? 이 묘한 뉘앙스는. 하루를 여는데 건장한 남자 바리스타의 미소가 커피만큼이나 좋은 에너지를 주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민 20년 차쯤 되면 중동계나 남미계로 보이는 남자들의 호들갑스러운 친절이 그들 문화라는 것을 잘 안다. (그렇다고 내가 그들의 친절에 심쿵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는 장담하지 않겠다.) 그럼에도 내 커피 취향을 두 번 만에 외운다거나 눈빛에 다정함이 뚝뚝 넘쳐흐르면 어쩔 수 없이 기분이 말랑해진다. 물론, 검정 반 팔 티셔츠 아래로 보이는 물결치는 근육이나 스윗한 동굴 보이스가 필수 요건이긴 하다. 어쨌든 이 모든 조건을 갖춘 남자가 지금 내 앞에서 색다른 빛깔의 미소를 날리고 있다. 우리는 오늘이 겨우 세 번째 대면인데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롱블랙이 담긴 컵 뚜껑에 은박지로 싼 초콜릿을 얹어주며 오늘 자기 마음이란다. 이럴 때 나이 든 여자가 속마음을 솔직하게 다 말할 수는 없다. ‘은밀한 웃음’이라는 지문으로 대치할 수밖에. 기분이 환해진 나는 힘차게 회사로 향한다. 역시나 회사는 입구부터 소란스럽다.
장애인 사우들은 인사에 정말 진심이다. 인사를 제대로 하지 않는다고 봉변에 가까운 컴플레인을 받은 적이 있는 나는 자동문이 열리는 순간 녹음테이프처럼 톤을 높인다. 그런데 기류가 이상하다. 나를 향해 인사하던 스컷, 앤드루, 모세는 물론이거니와 종일 화가 나 있는 마크까지 표정이 이상야릇하다. 우리가 아주 가까운 사람이라도 되는 양 눈빛에 장난기와 다정함이 가득하다.
덩치 큰 남자 장애인들을 통솔하려면 친절과 봉사 정신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이들과 잘 지내기 위해서는 남다른 카리스마와 순발력으로 적당히 간격을 유지하는 요령이 필요하다. 이런 면에서 나는 꽤 유능한 리더라 자부한다. 그런데 지금 이들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의 강도는 기준치를 넘고 있다. 급기야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는 티머시가 손가락으로 내 가슴을 포인트 하며 큰소리로 웃는다.
“굿 모닝! 베이비!”
베이비라니? 이게 뭔 소리! 얼굴이 빨개지며 수줍어하는 티머시를 보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진다. 이거였구나. 이것 때문이었구나. 며칠 전 한국 옷 가게에서 산 티셔츠에 수놓아진 글자였다. 오늘 나를 향해 흐르던 이 묘한 기류의 출처가 바로 이 글자에 있던 거다. 가슴 한가운데 큼지막하게 붙어 있는 ‘Call me baby’.
기하학적으로 수놓아져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디자인이 고급스럽고 몸에 잘 맞는 바람에 살펴볼 생각조차 안 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재앙이다. 하필 붙어 있는 위치까지 어찌 이리 절묘하단 말인가.
어린애 같은 장애인 사우들에게 제대로 먹잇감을 푼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일에 사용하는 스티커를 서로의 등에 붙여 놓고는 깔깔거리며 즐거워하는 친구들이다. ‘pick me’ ‘send back the dirty cutlery’ ‘50% off’ ‘Incomplete’ 등등. 주로 화장품이나 항공사에 보내는 물품에 붙이는 스티커들인데 사람에게 붙이면 꽤 재미있는 장면이 연출
출된다. 아무리 그래도 Call me baby(자기라고 불러주세요.)만큼 은근하면서도 노골적으로 유혹하는 문구는 없을 것 같다. 각자의 경험치에 따라 각기 다른 색깔을 지니겠지만 말이다.
베이비 뒤로 여자, 자기, 사랑 등등의 단어가 자막처럼 지나간다. 여기에 ‘당신의’라는 소유격이 자동으로 따라붙을 것이니 직역한다고 해도 피해 갈 구멍이 없다. 한껏 양보해서 귀엽게 봐달라는 호소라 치자. 아무리 그래도 나는 ‘내 나이가 어때서’를 외치기엔 누가 보아도 용서가 안 되는 나이다. 이쯤 되니 ‘베이비’라는 단어가 괴물처럼 보인다.
문자에서 뜻을 빼면 문양이 남는다. 글자는 하나의 디자인이 된다. 전설적인 팝스타 브리트니 스피어스가 ‘신흥호남향우회’란 글자가 들어 있는 원피스를 입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아무리 디자인이라 해도 웃지 않을 한국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나저나 거금 들여 산 티셔츠를 그대로 버리자니 아깝다. 수선집에 가져가서 not 자를 슬쩍 끼워 볼까 싶다. Call me not baby? 아! 문법도 맞지 않고 어쩐지 더 노골적인 느낌이다. 속마음을 감출 때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의 심리가 작용한다고 했다. 오죽했으면 연애의 정석에 ‘안 돼요 돼요 돼요…….’라는 우스갯소리가 있겠는가. 그냥 포기하자.
솔직히 말해 뭇 남성들의 은밀한 시선이 나쁘지 않았다. ‘이 나이에’ 하며 결과론적으로 얼굴을 붉혔지만, 청춘의 호르몬이 생긴 건 사실이다. 주책은 주님이 주신 책이라 했던가. 잠시였지만 짜릿했다. 오늘 혹시 당신이 센트럴 역 근처를 지나다가 누군가의 은밀한 미소를 보게 되거들랑 다 내 가슴에서 나온 사랑의 구애라 여기시라. 내가 좋아하는 심보선 시인의 시 한 구절이 절절히 와 박힌다. 이런 날이 내게도 왔나 보다.
늙어가는 모든 존재는 비가 샌다/비가 새는 모든 늙은 존재들이/새 지붕을 얹듯 사랑을 꿈꾼다/누구나 잘 안다 이렇게 된 것은/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된 것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거다.
이원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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