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 한편 산문 한 편 ❾

박상봉 기자

등록 2025-09-01 00:08


| 시 | 구월이 오면


박상봉 


오리라, 차창 밖으로 손 흔들며

명절날 찾아오는 귀성객처럼


달리는 버스에 지친 몸 싣고

속절없던 시절의 아직 끝나지 않은 방황이


깊은 골짝 긴 강 건너오리라


우리는 기다린다


시금치밭 같이 싱싱하고 푸른 밤

어둠이 없는 밤, 고통이 아닌 밤을


기다린다, 거듭 날이 바뀌고

핀 꽃들이 시든 뒤에도


정처 없이 객지를 떠돌던 우리들의 안부

발걸음도 가볍게 돌아오리라


구월이 오면 보게 되리라

흰구름에 젖은 늦은 오후

그대 이름 불러주리라


냇물에 멱 감고 흐르는 낮은 목소리 듣게 되리라

ㅡ 박상봉 시집 『물속에 두고 온 귀』 72~73쪽


| 산문 | 구월이 오면


구월이 오면, 바람의 결이 달라진다. 팔월의 뜨거움이 가신 자리에, 서늘하면서도 다정한 공기가 들어선다. 사람들은 말하지 않아도 그 변화를 안다. 창문을 여는 순간, 몸이 먼저 계절을 알아차린다.


구월은 늘 돌아옴의 달이다. 떠돌던 발길이 고향으로 향하고, 헤매던 마음이 제자리로 돌아온다. 들판에서는 벼가 고개를 떨군다. 아직은 초록빛이지만 곧 황금빛으로 변할 준비가 되어 있다. 구월은 수확의 달, 열매가 맺히는 달, 기다림이 보답받는 달이다.


도시의 가을은 조금 다르다. 여전히 빠른 걸음 속에 살아야 하지만, 불현듯 하늘을 올려다보면 구월의 푸름이 눈에 들어온다. 그 순간만큼은 삶의 속도가 늦춰진다.


구월이 오면, 밤도 달라진다. 더 이상 끈적하고 무겁게 덮쳐오는 열대야가 아니다. 시금치밭처럼 싱싱하고 푸른 밤, 고통보다 평온이 더 큰 밤이다. 사람들은 가을을 맞으며 숨결을 고르게 내쉰다.


꽃들은 저마다 계절을 다르게 기억한다. 이미 진 꽃들도 있지만, 배롱나무는 여전히 붉게 피어 있다. 구월은 사라짐과 남음, 끝과 시작이 동시에 깃든다.


구월은 강의 목소리마저 낮춘다. 여름 내내 요란하던 물살이 가라앉고, 골짜기를 지나며 차분히 노래한다. 그 소리를 들으며 사람들은 문득 누군가의 이름을 떠올린다. 오래 불러주지 못한 이름이 가을 강가에서 다시 울린다.


구월이 오면, 우리는 안부를 생각한다. 떠돌던 친구, 멀리 있던 가족, 소식이 끊겼던 이들의 얼굴을 불현듯 떠올린다. 이 달에는 발걸음이 자연스레 서로를 향한다.


구월은 눈부시게 높아진 하늘로 말을 건다. 흰 구름이 흘러가는 오후, 그 아래서 사람들은 오래 묻어둔 말을 꺼내어본다. 사랑한다, 보고 싶다, 잘 지내고 있느냐. 가을의 공기는 그런 고백을 담아내기에 알맞다.


구월이 오면, 결국 삶은 조금 더 깊어진다. 여름의 불꽃 같은 순간을 지나, 수확의 무게를 안은 계절이 우리 앞에 선다. 나는 이 달의 문턱에서, 잊었던 이름을 다시 부르고, 오래 기다린 마음을 다시 꺼내본다. 구월은 그렇게 우리를 기다려온 달이다.

|박상봉 시인 약력


경북 청도 출신으로 대구에서 성장. 1981년 박기영·안도현·장정일과 함께 동인지 『국시』 동인으로 문단활동 시작. 주요 시집 『카페 물땡땡』(2007), 『불탄 나무의 속삭임』(2021), 『물속에 두고 온 귀』(2023) 출간,  근현대 문학·예술 연구서 『백기만과 씨뿌린 사람들』 공저(2021). 고교시절부터 백일장·현상공모 다수 당선. 1990년 현암사 『오늘의 시』 선정, 제34회 대구시인협회상 수상.  북카페·문화공간 ‘시인다방’ 운영, 시·IT융합 문화기획, 중소기업 성장 컨설팅 전문가.

박상봉

박상봉

기자

헤드라인 뉴스

한국매일뉴스
등록번호인천 아 01909
등록일자2025-07-05
오픈일자2025-07-05
발행일자2025-07-05
발행인최용대
편집인이원희
연락처010)8834-9811
이메일yong727472@naver.com
주소 인천 서구 원당대로 628 714호 보미 골드 리즌빌
한국매일뉴스

한국매일뉴스 © 한국매일뉴스 All rights reserved.

한국매일뉴스의 모든 콘텐츠(기사 등)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