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료 시인들 사비로 기념 동판 제작, 고인이 늘 앉던 창가 벽면에 부착
삶의 가장 낮은 자리에 대한 지극한 연민을 노래한 시인의 정신 기리는 모임 더 뜻깊어
르네쌍스 / 문인수
동구시장 입구 삼거리 코너 건물, 이 연립상가 이층에 내 단골 다방이 있다. 어느 기숙사 구내식당용으로나 쓰던 건지, 헌 호마이카 식탁 여섯 개가 일고여덟 평 공간을 엉성하게 메우고 있다. 식탁마다 비닐 커버를 씌운 철제 의자가 어수선하게 딸려 있고, 시퍼런 활엽 화분 몇 개가 여기저기 마지못해 놓여 있다. 사십대 중반? 갈 때마다 주인여자 혼자다. 혼자 책 읽다가, 먼 데서 떠오르는 듯 천천히 일어선다. 일어서는 바람에 떨군 마른 티슈 낱장처럼 희끗, 웃는다. 웃을 뿐, 도대체 뭔 말이 없다. 소리가 없는 여자는 그렇게, 어쩌다 간혹 들어서는 손님을 썩 반기지도, 그야 물론 박대하지도 않는다. 손님이 나갈 때도 여자는 천천히 진공 상태 같다. 여자한테 아마도 작은 뱃전에 매단 폐타이어 같은 완충이 항상 붙어 있는 게 틀림없다. 화장기 없는 답답한 얼굴, 여자는 늘 흰 블라우스에 검정 주름치마다.
나도 늘 같은 자리에만 앉는다. 찻길, 그리고 시장 쪽 창가다. 창밖 채소·과일 노점들, 노점 할머니며 장 보러 나온 주부들, 집에 가는 학생들, 저기 신호등이며 얼룩덜룩한 횡단보도며 차량들, 복잡하게 엇갈리는 사람들, 옥신각신하는 볼일들이 데면데면 다 내려다보이는 포인트다. 그러나 바깥은 참 오랫동안 변화라고 모르고, 축제도 모르고…… 여자와 나는 또한 몇 해째 서로 성씨도 모른다는 것 아니냐.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은, 아무것도 모르는 세월이다. 썩지 않는 평화야 없겠지만, 이 다방 안에서는 어쨌든 다시는 그 누구도 망할 일 없을 것이다. 그 어떤 ‘부흥’도 들이닥칠 리 없는 이 편한 자리, 나는 걸핏하면 ‘르네쌍스’의 관람석에 갇힌다.
- 문인수 시집 『적막 소리』 (창비,2012)
대구 동구시장 입구 삼거리, 오래된 연립상가 이층에 자리한 다방 ‘르네쌍스’.
대구 동구시장 입구 삼거리, 오래된 연립상가 이층에 자리한 작은 다방 ‘르네쌍스’. 낡은 호마이카 식탁 여섯 개, 비닐 커버가 씌워진 철제 의자, 시퍼런 화분 몇 개가 마지못해 놓인 듯 서 있는 이곳은 화려하지도, 특별하지도 않은 공간이다.
한국 서정시의 대가 고(故) 문인수(1945~2021) 시인에게 이곳은 일상의 관람석이자 시의 배경이었다. 그는 늘 시장 쪽 창가 자리에 앉아 채소 노점과 횡단보도의 분주한 발걸음을 내려다보며, 세상 밖의 소란에서 벗어난 고요한 평화를 기록했다.
그의 시 「르네쌍스」에는 바로 이 다방 풍경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지난 4일 시인이 늘 앉던 창가 자리 벽면에 그를 추모하는 작은 동판을 새겨 붙이는 모임이 조용히 열려 화제가 되고 있다.
(뒷줄 왼쪽부터) 장옥관 신상조 엄원태 송재학 윤일현 (앞줄) 이하석문인수 시인과 깊은 인연을 맺어온 동료 시인 이하석·장옥관·엄원태·송재학·윤일현과 평론가 신상조 등이 자리를 함께했다. 이하석 시인이 직접 그린 문인수 시인의 초상과, “나는 걸핏하면 ‘르네쌍스’의 관람석에 갇힌다”라는 시 「르네쌍스」의 마지막 구절을 새긴 손바닥 크기의 동판을 부착하며, 생전 시인의 숨결을 이곳에 남겼다.
문인수 시의 핵심은 “삶의 가장 낮은 자리에 대한 지극한 연민”에 있다. 그런 점에서 시인의 단골 다방에서 차 한 잔 나누는 방식으로 마련된 이번 추모 모임은 지난 6월부터 8월까지 대구 범어도서관에서 열린 고인의 회고전에 이은 또 다른 ‘문인수 기억하기’로 가장 문인수다운 기념행사였다는 후문이다.
르네쌍스 창가 자리 벽면에 부착한 문인수 시인의 초상과 시 「르네쌍스」의 마지막 구절을 새긴 작은 동판.
참석자들은 “문학관, 시비 건립 등 거창한 행사에 비해 지나치게 소박한 행사였지만, 그래서 오히려 뜻깊은 자리였다”면서 특히 “동료 시인들이 호주머니를 털어 동판을 제작했다는 점과 시인의 체취가 깊이 밴 생활 속 공간에 손바닥만 한 동판을 붙이는 일이 작고 문인 기념 형식에 하나의 시발점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라고 소회를 밝혔다.
이하석 시인은 “문학은 때로 거대한 기념비보다, 일상의 작은 공간에서 더 깊이 살아남는다. ‘르네쌍스’는 이제 문인수 시인의 부재를 넘어, 그의 시와 숨결을 품은 또 하나의 문학적 풍경이 되었다.”며, “문인수 시인의 시에서 전해지는 조용한 울림과 따뜻한 감성을 마주하고, 소중한 문학적 자산을 다시 바라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라고 전했다.
박상봉 사회부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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