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 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 끝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微風)에 날아갔습니다.....
만해 한용운 문학관
크리스마스 연휴를 맞이하여 오랜만에 여행삼아 충남 홍성에 위치한 만해 생가와 문학체험관을 찾았다.
만해(卍海) 한용운 시인은 일제강점기 불교계에 혁신적인 사상을 전하고 독립운동에도 앞장을 섰던 승려이자 시인이며 독립운동가이다.
법명이 용운, 법호는 만해이며, 1905년 백담사에서 득도한 뒤 수년간 불교활동에 전념했다고 한다.
1918년 불교잡지 <유심>을 창간하고 계몽적 성격의 글을 발표했다.
너무나 잘 알려진 바와 같이 3·1운동 때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해서 기미독립선언서에 그 유명한 공약3장을 추가한 장본인이며,
그 일로 인해 일제에 체포되어 3년 형의 옥고를 치렀다.
이 부분에서 내가 읽은 故 김동길 교수의 산문집 중에서 “나이 듦이 고맙다“에 이러한 글이 나온다.
“3.1운동에 참여했던 민족대표 33인 중에 왜 변절자가 많이 나왔는가를 깨닫습니다.
그들에게는 희망이 없었다는 것, 즉 언젠가 이 나라에 해방이 오리라는 믿음이 없었다는 것이 변절의 이유라 할 만합니다.
왜정말기 일본이 전 세계를 지배하리라는 전망이 너무도 우세해지자 그들은 더 이상 조국의 해방을 기다리지 못하고 변절자 대열에 들어서고 맙니다.
문학계에서는 명사로 이름 날렸던 춘원 이광수나 육당 최남선 같은 이들의 변절은 그래서 안타깝기 짝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와는 달리 한용운 선생 같은 분은 끝까지 변절하지 않고 애국자로서 자신의 생을 영광스럽게 바쳤습니다.
만해의 생각은 이러했을 것입니다.
“아무려면 일본이 한반도를 영원히 지배하겠는가? 우리 한민족이 어떤 민족인가?
이 민족은 결코 누군가의 지배 속에 놓일 민족이 아니다”라는 조국의 해방에 대한 믿음이 그분의 생을 붙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만해 한용운 시인을 존경하고 이광수나 최남선은 이 문학기행 대열에서 일찍이 제외시켰습니다.
만해는 1925년에 한국 근대시사의 불후의 업적 “님의 침묵”을 펴내어 민족의 현실과 이상을 시적 이미지로 형상화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고등학교 때는 이 시를 외우느라 힘들었지만 여기서 그 시를 다시 한번 읊조려 본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 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 끝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微風)에 날아갔습니다.....
우리가 홍성군 결성면 만해로 318번길 83에 위치한 만해의 생가 및 문학체험관을 찾은 시각은
겨울 햇빛이 그나마의 온기를 거의 잃어갈 때쯤인 늦은 오후였다.
추운 겨울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중학생들을 태우고 현장 교육을 온 관광버스 1대가 나름 반갑기만 했다.
벌써 관람을 다했는지 이내 재잘거림은 버스와 함께 사라져갔다.
우리가 찾은 만해 생가는 두 칸으로 된 초라한 한옥이다.
“법의 바퀴는 크게 굴러간다” 라는 뜻의 (전대법륜)이 친필로 제작된 현판 좌측 밑으론 “님의 침묵” 액자가 걸려있다.
나는 방명록에 “님의 독립의지,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기록을 남겼다.
생가 뒤뜰 마당에는 감나무 한 그루가 몇 개 안 남은 까치 밥을 간신히 붙들고 차마 떨어뜨릴세라 앙상하게 떨고 있다.
생가를 지나 계단을 올라 사당으로 들어가니 사당 좌우에 키가 제법 큰 목백일홍 일명 배롱나무 한 쌍이 데칼코마니식으로 마주 보고 서 있다.
문이 잠겨있어 사당 안을 들여다 볼 수는 없었지만 해가 점점 기울어가는 언덕마루에 세워진 사당은 관람객이 더 이상 없어 쓸쓸함을 더했다.
다시 내려와서 만해 시비공원 안에 있는 동상 옆에서 인증 샷을 찍어 본다.
그 아래로 만해가 기미선언문에 추가로 기재할 것을 주장한 공약3장의 문구가 새겨져 있는 비석에서는 그의 독립의지의 결연함을 엿볼 수가 있었다.
입구 주차장 쪽에는 만해 문학 체험관이 있다.
체험관 안으로 들어가니 왼편에서는 한용운시인의 일대기를 보여주는 동영상이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나오고 있다.
전시관에는 만해의 작품들과 서적들이 빼곡히 전시되어 있다.
한편, 수년 전에 둘러 본 적이 있는 강원도 인제군 용대리 내설악의 백담사.
만해 시인의 대표적인 시 “님의 침묵”을 집필한 곳이기도 한 이곳 백담사 경내에는 만해선생의 민족사랑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지난 1997년에 완공한 기념관이 있다.
110여 평 규모로 모두 800여 점의 유물이 상설 전시되고 있으며, 기념관 한편에서는 만해의 일대기가 비디오로 상영되고 있고,
만해를 기리는 후학들이 만든 조각품 및 초상화 등도 선보이고 있다.
여기서 나는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알아냈다.
가수 심수봉의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라는 노래에서 제목과 가사가 만해 한용운의 시 “나룻배와 행인”을 많이 닮았다는 것이다.
나룻배와 행인 / 한용운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옅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만해는 위의 시에서 시적 화자(話者)인 나와 당신의 관계를 나룻배와 행인의 관계로 설정하며
인내와 희생 그리고 사랑에 대한 숭엄한 의지를 노래하고 있다.
이 시에서는 “나는 나룻배”로 “당신은 행인”으로 시작하는데 노래 가사와 대비해 보면
남자(배)는 당신(행인), 여자(항구)는 나(나룻배)와 연결이 된다.
즉, 한쪽은 묵묵히 기다리고 베푸는 존재, 다른 쪽은 이용만하고 떠나는 존재이다.
노래에서는 한쪽이 쓸쓸한 표정 짓고,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다른 쪽을 원망하지만,
시에서는 흙발로 나를 짓밟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가는 희생이 탐탁하여 마음이 기쁘다.
이러한 희생은 만해 특유의 글에서의 종교적 심성이다.
2018년 12월 22일
이원희 보도본부/ 편집국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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