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풍습인 벌초를 문화·역사·정신적 맥락 속에서 조망하며, 효와 기억, 세대 간의 연결성을 깊이 있게 탐색하게하는 벌초의 유래와 낫끝에 깃든 효심은 인류학적 시선과 결합해, 사라져가는 풍경을 통한 오늘의 삶과 뿌리를 성찰하게 만든다 -이원희기자-

가을 햇살이 기울어드는 들녘, 땅 위의 풀들은 마지막 힘을 다해 고개를 치켜듭니다. 들판의 벼가 황금빛으로 물들 듯, 산자락의 풀들도 제 몫의 생을 다하기 위해 온몸을 흔듭니다. 바로 이때, 사람들은 낫을 들고 산을 오릅니다. 무성하게 자란 풀을 베어내며 조상들의 묘역을 단장하는 풍습, 그것이 바로 ‘벌초’입니다.
벌초는 오랜 세월 동안 우리 민족의 가슴속에 뿌리내린 효의 상징이자, 기억을 이어가는 의식입니다. 《예기(禮記)》에는 “묘소를 살피고 제초하는 것은 효의 시작”이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고려와 조선에 이르러 성리학적 예법이 자리 잡으면서 해마다 잊지 않고 실천해야 하는 ‘살아 있는 제례’로 이어졌습니다. 풀 한 포기 뽑는 일에도 조상을 기리는 마음이 스며 있었던 것이지요.
옛날의 벌초는 가족과 종친이 함께하는 축제이기도 했습니다. 산속에서 땀 흘려 낫질을 하며 서로의 안부를 묻고, 준비해 온 음식을 나누던 모습은 계절이 선물한 또 하나의 잔치였습니다. 조상 앞에 둘러앉아 웃음과 정을 나누는 일은 후손들이 ‘같은 뿌리에서 뻗은 가지’임을 확인하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던 억새꽃, 땅 위에 내려앉은 이슬, 그 속에서 나누던 말 한마디는 모두가 ‘기억의 끈’이 되어 우리 삶을 지탱해 주었습니다.
오늘날 도시의 삶은 바쁘고, 벌초를 대신해 주는 전문 업체가 생기면서 이 풍습은 점차 간소화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풀을 베는 행위 하나에도 숱한 의미가 담겨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낫끝에 맺히는 풀잎의 향기 속에는 세대를 이어 온 효심이 깃들어 있고, 맑은 바람 속에서 들려오는 매미의 마지막 울음소리는 우리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일깨워 줍니다.
벌초는 세월 속에 묻힌 기억을 되살리는 행위입니다. 낫질 하나하나에 부모와 조상의 숨결을 더듬고, 흙냄새 속에서 삶의 뿌리를 확인하며, 세대를 이어갈 다짐을 새기는 것입니다. 가을의 푸른 하늘 아래서, 풀잎을 베어낸 자리에 맺히는 흙내음은 곧 우리가 물려받고 지켜야 할 삶의 향기이기도 합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풀을 베며 우리는 묻습니다.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그리고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 단순하면서도 깊은 물음 앞에서 벌초는 여전히 우리 곁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연이 주는 계절의 가르침이자, 인간이 이어가는 기억의 의식이기 때문입니다.
시와늪문인협회 대표 배성근
배성근 회장
이원희 보도본부/ 편집국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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