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경
호주 시드니 거주. 경기도 파주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고 의정부에서 성장했다. 1998년 호주 시드니로 이주. 이민 초기 남편과 함께한 사업이 모두 실패의 연속이던 시절, 인터넷 블로그에 하소연하듯 글을 올리는 것이 마음을 푸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글쓰기가 수필이라는 문학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현재는 쇼핑센터 주방용품 가게에서 판매원으로 일하고 있다. 2009년 계간 『문학시대』 수필 등단. 2015년 『배틀한 맛을 위하여』 출간. 2022년 해외 한인 5인 공저 『바다 건너 당신』 출간. 현재 문학동인 캥거루와 수필U시간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녹아버린 하루
단톡 창에 메시지와 함께 영상이 하나 올라온다. 화면 속은 온통 하얀 세상이다. 카툼바 산마을에 눈이 펄펄 내리고, 나뭇가지마다 흰 눈으로 소복하다. 이곳에서 2시간 거리에 있는데 완전히 다른 세상이다. 자동차들은 지붕 위에 소복이 쌓인 눈을 털어내지 않고 엉거주춤 달리고 있다. 이곳은 눈이 너무 귀하다 보니 눈 소식을 들으면 북반구에서 보내오는 편지처럼 반갑다.
‘나도 가야지! 어서 눈을 만나러 가야겠다.’ 나는 누가 잡아당기기라도 한 듯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부리나케 옷을 입으려니 급한 마음에 손이 떨려서 단추도 얼른 채워지지 않는다. 블루마운틴 찬바람에 대비해 목도리를 칭칭 감는다. 단단히 채비하고 밖으로 나오니 차가운 집 안 공기와는 달리 바깥 날씨는 따뜻하다. 집 근처 기차역을 향해 걷는 데 마음과는 달리 걸음이 더디다. 기차역으로 들어서는 순간, 쓰고 있던 안경이 스르르 떨어진다. 연결 부분 나사가 빠졌던 모양이다. 공연히 불길한 생각에 마음 한 자락이 불편해진다. 파라마타에서 다시 카툼바행 기차로 갈아타고 자리에 앉는다. 기차는 제법 많은 사람으로 북적인다. 아이들과 함께 탄 가족들 모습이 눈에 띤다. 손에 낀 두툼한 장갑은 벌써 눈사람 만들 기대에 부풀어 있는 듯하다. 누구라도 불러서 같이 가자고 할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스친다. 급하게 나오느라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시드니의 겨울은 6월부터 8월이다. 한겨울에도 영하로 내려가지 않아 눈 내리는 풍경을 볼 수가 없다. 겨울로 들어서면 가끔 블루마운틴에 눈이 와도 설경을 직접 보게 되는 건 행운이다. 어쩌다 기온이 떨어지는 날 눈을 기대하며 블루마운틴으로 달려가지만, 늘 허탕을 친다. 펑펑 내리는 눈을 본 지가 언제인지 까마득하다.
파라마타에서 출발한 기차가 블루마운틴 초입의 스프링우드를 지나는데도 창밖은 여전히 햇살이 쨍쨍하다. 유칼립투스 잎사귀들조차 오늘따라 더 푸르게 반짝인다. 이대로 가면 정말 눈을 볼 수 있을까, 걱정이 스멀스멀 밀려오기 시작한다. 맑은 날씨에 눈이 녹았다 해도 흔적이라도 조금은 남아 있겠지. 카툼바는 산악지역이니까 기후가 여기와는 다를 거라고 애써 불안한 마음을 누른다. 이제 곧 눈을 만난다고 생각하니 눈과 관련된 사소하고 오래 묵은 기억들이 한꺼번에 떠오른다.
첫눈 오는 날 만나자던 약속. 광릉내 울창한 숲속으로 걸어 들어가면 펼쳐지던 아무도 밟지 않은 눈밭. 낙엽 위에 쌓인 눈을 밟으면 무릎까지 푹 빠지며 발밑으로 나뭇잎이 바사삭 부서지던 소리. 언제나 곁에 있을 것 같던 그리운 추억들은 모두 지구 저편에 있다.
드디어 기차가 카툼바역에 멈춘다. 차가운 바람이 품속으로 파고든다. 얼른 지퍼를 올려 옷을 여미고 주위를 둘러본다. 어디에도 눈은 보이지 않는다. 에코 포인트로 가면 눈 구경을 할 수 있겠지. 기차에서 내린 사람들 발걸음도 바쁘다. 에코 포인트로 향하여 걸어가다 보니 어느 순간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빤한 길이라 생각했는데 갑자기 길 한가운데서 막막하다. 휴대전화 내비게이션을 켠다. 내비게이션이 일러주는 대로 걷는다. 어느 공터 앞을 지나는 데 희끗희끗한 게 보인다. 눈이다. 얼른 다가가서 손으로 만져보니 정말 눈이다. 손바닥엔 눈물 같은 물 한 방울 남는다. 서둘러 영상 속의 장소로 향한다.
드디어 에코 포인트다. 바람이 거세다. 세 자매 봉 밑으로 펼쳐지는 블루마운틴 산자락만 더욱 웅장하게 다가선다. 눈은 온데간데없다. 분명 오늘 아침 지인이 올린 사진과 영상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아무리 날씨가 따뜻하기로 그새 다 사라져 버렸나? 눈이 쌓여 조심조심 걷던 풍경은 신기루였던가? 눈 소식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은 블루마운틴의 풍경만 하염없이 바라본다. 세찬 바람 때문에 손에 쥔 휴대전화를 떨어뜨릴 것 같다. 세 자매 봉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려고 셔터를 누르는데 전원이 스르르 꺼져버린다. 서둘러 나서느라 배터리 상태를 확인 못 했다.
허탈한 마음으로 되돌아 기차역으로 터덜터덜 걷는다. 어느 집 앞에 발이 멈췄다. 둥글고 큰 눈사람이 반쯤 녹아내려 긴 치마를 입은 모양으로 서 있다.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내게 말을 건네는 듯하다.
‘봐! 눈이 온 거 맞지?’
‘그래, 눈이 오긴 왔었구나.’
순간 뺨으로 물기 같은 것이 느껴진다. 올려다보니 어둑어둑해지는 하늘에 너무도 가는 먼지 같은 눈이 날린다. 다시 눈을 빚기엔 하늘이 힘에 부치나 보다. 나도 그만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는다. 눈이 그리운 이의 편지라도 되는 양 종일 홀린 사람처럼 시간을 보냈다. 돌아오는 내내 서운한 마음이 가시질 않는다. 아침에 안경이 고장 난 것이 무슨 예시였나. 눈 소식을 조금만 더 미리 알고 일찍 출발했더라면 만날 수 있었을 텐데. 기다려주지 않고 떠난 애인을 찾아 헤매다 나의 하루가 다 녹아버렸다.
이원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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