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암 배성근 시와늪 문인협회 회장
살아생전에 아버지는 늘 그렇게 말씀하셨다.
“야야, 이 풀을 베야, 우리도 잊히지 않는다.”
그 말은 어린 시절 내 귀에는 그저 ‘일 좀 하라’는 재촉처럼 들렸다. 땡볕 아래, 벌초는 고역이었다.
풀잎이 허벅지를 베고, 온몸은 흙먼지와 땀에 젖었다. 하지만 해가 기울 무렵, 묘 앞이 단정히 정리되고 나면 이상하게도 마음 한켠이 시원했다. 그땐 몰랐다. 아버지가 베어내던 것은 잡풀이 아니라 ‘잊힘의 시간’이었다는 걸.
세월이 흘러, 이제는 아버지가 그 산소에 누워 계신다. 예전처럼 낫을 들고 산길을 오르다 보면, 어김없이 그 말이 바람결에 들리는 듯하다. “야야, 이 풀을 베야, 우리도 잊히지 않는다.” 아버지의 목소리에는 단순한 당부가 아니라, 삶의 철학이 담겨 있었다. 사람의 존재도, 기억도, 돌보지 않으면 금세 덮여버린다는 뜻이었다.
요즘은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세상은 점점 바쁘고, 사람들은 점점 산을 오르지 않는다. 벌초 대행 업체가 대신 풀을 베어주고, 사진 한 장이 ‘성묘의 증거’가 되어버렸다. 손은 편해졌지만, 마음은 멀어졌다. 풀은 잘 베어졌는데, 기억은 누가 가꾸고 있을까.
아버지가 낫을 들고 흙냄새 속에서 흘리던 그 땀, 그 땀방울이 바로 ‘기억의 뿌리’였다.
우리는 그 땀을 통해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배웠다. 풀을 베는 일은 결국 ‘조상을 기억하고 나를 다잡는 일’이었고, 그것이 한 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전하던 삶의 방식이었다.
이제 가끔 산소에 오르면, 묘비 앞의 풀보다 내 마음속 풀부터 눈에 들어온다. 무심히 자라난 무관심, 잊혀가는 감사, 희미해진 그리움. 그래서 나는 여전히 낫을 든다. 풀을 베는 손끝으로, 잊히지 않으려는 마음을 다듬는다.
아버지의 말씀이 오늘따라 더욱 선명하게 들린다.
“야야, 이 풀을 베야, 우리도 잊히지 않는다.”
그 말이 곧, 나의 벌초이자 나의 기도다.
시와늪문인협회 대표 배성근
최용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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